실적 무리하게 달성하면 사고 나
영업 하나하나 상식선서 두드려봐
'돈에는 꼬리표 있다' 생각 때문에
지인이 돈 맡아 달라면 모두 거절
대신證 입사후 M&A 전문가 명성
투자자문회사 IMF로 자본금 잃고
벤처 붐 땐 투자금 휴지조각 돼
김한 JB금융그룹 회장과 인연
캐피탈 맡아 광주은행까지 인수
지난 1980년대 초반 대학을 졸업하고 무작정 일본으로 건너간 한 사람이 있었다. 한국이라는 좁은 테두리를 벗어나 일을 배우면서 공부도 더 해볼 작정이었다. 급여 수준이나 생활환경 모두 나무랄 것 없는 삶이었다. 하지만 가끔 한국을 찾을 때면 어김없이 마음이 흔들렸다. 일본에 한참 뒤처져 있던 한국이었지만 역동성만큼은 매력적이었다.
"달콤함에 안주하면 할수록 자꾸만 처지는 느낌이었어요. 고민 끝에 3년 만에 짐을 싸 한국으로 돌아갔지요." 임용택(사진) 전북은행장의 첫 사회생활 이야기다.
대신증권에 입사해 10년간 증권맨으로 살아온 그의 이력은 알려져 있지만 이후 2011년 JB우리캐피탈 사장으로 오기까지 15년간의 행적은 몇 개의 회사 이름으로만 기록돼 있다. 지난 20일 서울 여의도 JB빌딩에서 만난 임 행장은 한국 금융의 부침과 함께했던, 그의 알려지지 않은 여정을 풀어놓았다.
일본에 건너간 지 3년 만인 1985년에 한국으로 돌아온 후 직업을 찾던 임 행장에게 누군가 '앞으로 증권회사가 잘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증권의 '증'자도 몰랐던 그였지만 신문에 난 대신증권의 경력사원 모집광고를 보고 바로 지원했다. 임 행장은 "당시 메이저 증권사는 대우와 LG·대신·동서 이렇게 네 곳이었다"며 "대우와 LG는 재벌 계열이니 잘나갈 만도 했는데 대신은 달랐다"며 "아무것도 없는데 메이저로 들어간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대신에 지원했다"고 돌아봤다.
기업 인수합병(M&A) 업무에 집중하면서 임 행장은 입사 10년 만에 국내 업계에서는 누구나 알 만한 M&A 전문가로 통했다. 다른 회사의 초청을 받아 강연을 하러 다닐 정도였다. 회사에서는 임원 승진을 목전에 두던 시기였다.
임 행장은 "깊은 회의가 찾아왔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업무뿐만 아니라 신경 써야 할 다른 일들이 생겨나는 것에 피로를 느꼈다"며 "회사에서는 만류했지만 결국 사표를 냈다. 아무 준비도 없었지만 자신감은 넘쳤다"고 말했다.
회사를 나와 서울 명동에 '림앤파트너스'라는 이름으로 13평짜리 사무실을 냈다.
시작하자마자 M&A 3건을 성사시켰고 1년 만에 10억원을 벌었다. 이렇게 번 돈으로 다음에 만든 것이 토러스투자자문이다. 그때 IMF 외환위기가 왔다. "아주 작살이 났죠. 자본금 10억원을 거의 다 까먹었어요. 그런데 슬슬 벤처 붐이 불기 시작하더라고요. '이제 내 바닥이다' 생각했어요. 기업공개, 유상증자, 전환사채(CB), 신주인수권부사채(BW) 발행 이런 업무에는 도가 텄으니까. 자본금 100억원짜리 토러스벤처캐피탈을 설립하고 벤처 투자를 엄청나게 했어요. 2000년에는 돈 버는 게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던 때니까 두려울 게 없었죠." 하지만 얄궂게도 벤처 붐은 길지 않았다. 투자금은 순식간에 휴지조각이 됐다.
다시 바닥으로 떨어진 임 행장이 찾은 곳은 KAIST였다. "시장에 벤처기업라고 끊임없이 밀려오는데 도통 기술력을 믿을 수 있는 곳이 없었어요. 그래서 교수들과 같이 회사를 아예 만들었죠. 생명공학이랑 소프트웨어·통신사업 이런 걸 하는 업체들을 한동안 운영했어요." 어렵게 만든 통신장비였지만 KT에서는 받아주지 않았다. 기계를 썩힐 수 없었던 그는 전국 아파트 단지에 전단을 붙이고 가입자를 모았다. 통신장비 개발부터 가입자 모집, 설치와 과금, AS까지 딱 2년을 매달린 끝에 손익분기점을 넘겼고 매각했다.
"회사를 팔고 나서 금융시장을 돌아봤어요. 벤처의 시대는 저물었고 구조조정이 진행되고 있더라고요. 부실채권(NPL) 사업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메리츠인베스트먼트파트너스라는 회사를 세웠어요. 그런데 구조조정 회사의 법적 토대였던 기업구조조정투자회사법이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에 흡수돼버렸어요. '구조조정도 갔구나' 하고 페가수스프라이빗에쿼티를 만들었어요. 프로젝트파이낸싱(PF)이 주업인 회사였지요. 증권사를 나온 후 3~4년에 한 번씩은 업종을 바꾼 셈이죠. 불확실했지만 망아지처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었어요."
그가 김한 JB금융그룹 회장과 인연을 맺은 것은 페가수스프라이빗에쿼티를 경영하던 당시였다.
대신증권에서 같은 시기에 근무했지만 각자 다른 부서라서 특별한 친분은 없었다. 그런데 2009년 약 300억원의 증자를 추진하던 전북은행에 임 행장이 돈을 대면서 약 5%의 지분을 가지게 됐다.
임 행장은 "규정상 경영에 참여해야 했기 때문에 사외이사를 2년간 했다. 그런데 자꾸 오라 가라 하고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어 그마저 때려치웠다"고 말했다.
다시 인연이 이어진 것은 김 회장이 캐피탈 인수를 자문하러 왔을 때다. "검토해봤더니 쉽지는 않지만 가능성이 있어 보이길래 사도 되겠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김 회장이 '임 사장이 맡아달라'고 제안을 하더라고요. 고민을 많이 했지. 답답한 게 싫어 15년을 별일을 다 하면서 다녔는데 이걸 맡아야 하느냐. 내 마음을 움직인 거는 결국 투자하면서 느낀 아쉬움이었어요. 큰 딜이 있을 때 작은 회사는 아무리 능력이 돼도 할 수가 없어요. 조직에 있었으면 할 수 있는 딜인데 말이죠. 게다가 살벌한 금융 바닥에서 혈혈단신으로 버티는 데 지쳐가고 있는 것도 있었죠. 그래서 캐피탈을 맡았는데 광주은행까지 인수하면서 전북은행장까지 하게 됐지요. "
30년을 금융계에서 살아온 그에게 변하지 않는 원칙을 묻자 그는 '상식'이라고 답했다.
"처음에 캐피탈을 산다고 할 때 전부 말렸어요. 난장판도 그런 난장판이 없다고. 그런데 비교적 성공적으로 안착했어요. 영업 하나하나를 상식선에서 두드려봤거든요. 통상적인 절차와 다르다든지, 갑자기 실적이 올라간다든지 하는 것은 경계 1순위지요. 우리 직원들한테도 늘 말하는 게 실적은 결과물이라는 거예요. 리스크를 잘 관리하고 영업도 열심히 하면 그때 나오는 게 실적이지, 실적 얼마 한다는 게 목적이 돼버리면 과정이 비뚤어지거든요. 분명히 실적을 무리하게 달성하려는 과정에는 뭔가 석연치 않은 것들이 구겨져 있어요. 사고는 반드시 이런 데서 나요."
돌다리도 두드리고 또 두드리는 임 행장의 경영원칙은 '돈에는 꼬리표가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지인들이 개인적으로 돈을 맡아달라고 하면 무조건 거절합니다. 아무리 잘사는 사람이라도 돈에는 꼬리표가 달려 있거든요. 자식 시집·장가 보낼 돈, 오래 살던 집을 팔아서 장만한 돈, 수십년간 일하면서 쌓아온 퇴직금 등등. 이런 걸 뻔히 알면 투자를 맡아서 하기 어렵죠. 지금 생각해보면 (부탁을 거절했던 게) 건방진 생각이었다 싶기도 하지만…허허"
"취미는 인문학 서적 탐독… 숫자와의 씨름 지칠 때면 미술작품으로 눈 돌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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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 is… |
사진=이호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