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스포츠 문화

[책] 200년 걸친 노비 집안의 신분 상승

■ 노비에서 양반으로, 그 머나먼 여정

권내현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


"무신난 이래로 고관이 천한 노예에서 많이 나왔으니 왕후장상(왕과 제후, 장수와 재상)의 씨가 어찌 따로 있으랴. 때가 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만 어찌 근골(筋骨)을 수고롭게 하며 매질 밑에서 곤욕을 당해야만 하는가."

고려 신종 때인 1198년, 최씨 무신정권 60년을 연 최충헌의 노비 만적은 이렇게 외치며 반란을 모의했다. 결국 시작도 못 하고 100여 명의 목이 달아났고, 비천한 신분을 벗는다는 건 그야말로 꿈같은 일이었다.

하지만 나라가 바뀌고 500여 년이 지나며 그런 꿈도 이뤄졌다. 그것도 주인의 호의보다는 노비 개인의 노력에 의한 신분 상승이. 고려대 역사교육과 교수인 저자가 규장각 등을 통해 당시 3년마다 기록된 호적대장으로 들여다보는 김흥발이 바로 그 경우다. 지배계급인 양반의 기록에 노비 따위에 대한 친절한 설명은 없다. 어디까지나 그 틈을 들여다보는 저자의 노력이다.


김흥발이 살았던 1678~1717년은 임진왜란·병자호란으로 나라가 피폐해진 가운데, 두 번의 대기근까지 찾아온 시기다. 다급해진 정부는 유생들의 경전시험을 면제하는 교생면강첩과 노비를 평민으로 풀어주는 '노비면천첩'을 팔았고, 김흥발에게는 기회가 됐다. 소작농을 하는 외거노비였던 그는 재산을 모아 평민으로 한 단계 격상되고, 다시 6~7대가 내려간 1831년 자손들은 양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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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당시 부계·양반 중심의 사회에서 기타 신분, 특히 노비의 고통은 컸다. 양반층이 빠져나간 자리에 바닥계층의 의무는 불어났다. 양반은 관직이 있든 없든 세금이 면제됐지만, 노비들은 돈이든 몸으로든 병역과 조세의 의무를 치러야 했다.

그나마 형편이 나았던 외거노비도 이중삼중의 굴레를 벗긴 힘들었다. 심지어 다른 양반의 여자 노비와 결혼한 남자 노비는 자신의 주인에게 재산상의 손해를 '기상(記上)'이라는 명목으로 배상했다. 여자 노비 주인이 자식 소유권을 가져가는 구조에서 잠재적 손실을 물어낸 것이다.

그렇게 특권을 누리는 양반도 자기들끼리는 내부적으로 경쟁이 치열했다. 그 수가 적다지만 좋은 벼슬자리는 더 적었다. 당연히 서얼·중인 등이 고급 관료 직에 진입하거나, 양반이 되어서는 안 됐다. 양반은 그들끼리만 결혼했고, 아래 신분과의 결혼에는 낙인을 찍었다. 반면 신분을 사서 양인이 된 천민들은 조상의 노비 신분 기록을 지워내려 애썼다. 이름을 바꾸고, '명예' 관직을 사고,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이사했다.

이렇듯 치열한 계급 간 공방전을 들여다본 저자의 마음은 강 건너 불구경이 아닌 듯하다. 에필로그에서 그는 경제력과 학력이 과거의 신분제처럼 특권화되고 대물림되는, "태어나면서 이미 출발선이 다른 '신 양반'층이 만들어지고 있는" 조짐을 우려한다. 1만2,800원.


이재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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