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일서 원격조종 무리한 사안까지 강요/미 재무차관 “방한활동”… 협상단 재량전무「시골에서 한가닥 한다는 노름꾼과 든든한 전주를 대동한 라스베이거스의 일류 도박사가 맞붙은 형국이다.」
정부와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 지원조건을 둘러싼 협상에서 우리 정부는 계속 한걸음씩 밀려 궁지로 몰리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재정경제원은 당초 외환보유액 실상을 정확히 밝히지 않은채 아직도 여유있는 것처럼 표정관리(블러핑)를 시도했으나 IMF측이 가용 외환보유액이 1백억달러를 밑돈다는 사실을 쉽게 눈치채 버렸다. 외화부도 직전이라는 사실이 들통난 이후 칼자루가 IMF측으로 완전히 넘어가면서 IMF의 공세에 버틸 여력이 없어져 4일간의 심야협상에서 하루에 한건씩 중요사항을 차례차례 양보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때문에 IMF가 구제금융을 통해 한국경제를 회생시키려는 게 아니라 아예 앉은뱅이로 만들어버리겠다는 속셈을 가진 게 아니냐는 우려까지 나오고있다.
IMF를 대리인으로 내세워 전주인 미국, 일본 등이 이번 기회에 한국을 잠재적 경쟁상대에서 완전히 탈락시켜 버리려는 속셈이 아니냐는 우려다.
이와 관련, 데이비드 립튼 미재무부국제담당차관이 최근 극비리에 방한, 서울 하얏트호텔에 묵다가 IMF와의 협상이 본격화되자 아예 숙소를 IMF실무협의단과 같은 힐튼호텔로 옮긴 것으로 밝혀져 협상과정에 미국이 깊숙이 개입했다는 의혹이 증폭되고 있다.
○…지난 1일 새벽 임창렬 부총리겸 재정경제원장관이 『실무협상이 마무리됐다. 미셸 캉드시 IMF총재와의 조율을 거쳐 1일 상오 발표하겠다』고 밝힐 당시만 해도 IMF 요구의 초점은 부실 종합금융사의 정리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당시 임부총리는 부실 종금사 처리문제와 관련, 캉드시 총재를 설득시킬 수 있을 것으로 낙관했다.
그러나 캉드시 총재는 우리측 희망을 일축하면서 부실 종금사를 IMF 요구대로 처리해야 한다는 원론만 고집했다.
2일 새벽까지 다시 벌어진 1차재협상에서 우리측은 부실 종금사 9개를 정리하는 쪽으로 대폭 후퇴했다. 정부는 이 정도면 IMF가 수긍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2일 상오 국무회의를 거쳐 공식 발표하겠다는 일정까지 잡았다.
그러자 IMF측은 갑자기 재벌처리와 은행 정리 문제를 들고 나왔고 협상은 또 꼬이기 시작했다. 청와대는 이날 상오 김영삼 대통령 주재로 비상경제대책자문회의와 국무회의를 열어 IMF자금지원 양해각서를 심의, 의결했다는 보도자료까지 사전 배포했다가 부랴부랴 이를 취소하는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다.
○…IMF측이 부실 종금사 처리에 이어 은행 정리, 재벌규제 강화 등까지 들고나오자 정부 일각에서는 IMF의 저의를 의심하는 분위기.
IMF가 다른 나라에 구제금융을 지원하면서 은행을 정리했다고 하지만 국내 대형시중은행처럼 규모가 큰 은행들이 아니었고 산업부문에 대해 직접적인 정책개입을 했던 적이 없었는데 유독 한국에 대해서만 까다롭게 구는 까닭을 알 수 없다는 지적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시중은행을 정리하게 될 경우 기업 연쇄도산은 물론 대그룹까지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IMF측이 잘 알면서도 이를 강요하는 의도가 매우 의심스럽다는 얘기다.
또 재벌그룹의 상호지급보증 해소, 연결재무제표 작성의무 강화, 노동시장 유연성 확대 등 전례없이 IMF가 산업부문에 대해 직접적인 요구사항을 내놓고 있을 뿐 아니라 일본의 오랜 요구사항인 수입선다변화제도 조기폐지 등 구제금융과는 전혀 관계없는 사안까지 제시하고 있어 정부협상단을 당혹스럽게 만들고 있는 실정이다.
워싱턴포스트 등 외국언론과 제프리 삭스교수 등 외국 전문가들도 IMF가 한국의 경제회복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경직된 정책을 강요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다.
○…이와 관련, 방한중인 실무협의단의 나이스단장 등이 협상처리와 관련해 아무런 재량권을 갖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 정부 협상단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고 있는 실정. IMF 구제금융협상의 경우 통상 본부에서 정해준 마지노선범위내에서 실무협의단이 재량을 갖고 협상을 벌인 뒤 본부에서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실무협의단의 협상결과를 존중, 추인하는게 관행이라고.
그러나 이번 협상에서는 캉드시 총재가 첫날 협상결과를 기각하면서부터 나이스 단장이 일일이 협상경과를 IMF본부와 캉드시총재에 보고하고 지시를 받은 후 다음 협상을 진행시키는 식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
한편 캉드시 IMF총재가 지난 7월과 11월 극비리에 두차례나 방한, 강경식 당시 부총리와 이경식 한은총재를 만나고 IMF 구제금융 신청을 권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이세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