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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리 슈틸리케 감독이 찍은 '양띠 상병' 이정협(24·상주 상무)이 축구 대표팀에 드리운 우려를 희망으로 바꿔놓았다.
4일 호주 시드니 파라마타스타디움에서 열린 한국과 사우디아라비아 대표팀의 평가전. 9일 개막할 호주 아시안컵에 앞선 최종 평가전이자 슈틸리케호의 새해 첫 A매치였다.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69위 한국은 102위인 사우디를 맞아 후반까지 끌려다녔다. 후반 22분에야 상대 오사마 하우사위의 자책골 덕에 앞서기는 했지만 55년 만에 아시안컵을 제패하겠다고 큰소리친 것에 비하면 1대0으로는 부족했다. 바로 이때 이정협의 한 방이 터졌다.
후반 추가시간 왼쪽을 완전히 허물어뜨린 남태희(레크위야)가 왼발로 침착하게 오른쪽의 김창수(가시와레이솔)에게 패스를 연결했고 김창수는 욕심부리지 않고 문전의 이정협에게 골 기회를 내줬다. 이정협이 넘어지면서 골망을 출렁이자 초조해 보이던 슈틸리케의 얼굴에도 환한 미소가 퍼졌다.
2대0으로 이겨 사우디와의 최근 4경기 전적을 2승2무로 만든 대표팀은 10일 오후2시(한국시각) 오만과 아시안컵 A조 조별리그 1차전을 치른다. B조의 사우디는 8강에서 다시 만날 수도 있는 상대다.
이정협은 슈틸리케가 박주영(알샤밥) 대신 뽑은 공격수다. 이동국(전북 현대)과 김신욱(울산 현대)의 합류가 부상으로 불발되고 박주영마저 소속팀에서 이렇다 할 활약을 보이지 못하자 슈틸리케는 이정협 카드를 뽑아들었다. 지난 2013년 프로(부산 아이파크) 데뷔 후 두 시즌 동안 주로 교체 선수였고 상무에서도 벤치가 익숙한 철저한 무명이었다. 하지만 문전에서 수비와의 경쟁을 이기고 공을 따낼 타깃맨을 찾던 슈틸리케는 키 186㎝, 몸무게 76㎏의 이정협을 지난해 10월부터 눈여겨봤고 지난달 제주 전지훈련에서 점검한 뒤 태극마크를 달아줬다.
청소년 대표 때도 국제대회 출전 경험이 없던 이정협은 이날 사우디전에서 A매치 데뷔전을 치렀다. 후반 28분 조영철(카타르SC)과 교체돼 들어간 이정협은 악착같은 움직임으로 골문을 위협하다 마지막 순간 데뷔전 데뷔골을 완성했다.
앞서 후반 시작과 함께 투입된 남태희의 돌파와 정확한 판단력도 골만큼 돋보였다. 지난해 슈틸리케 부임 이후 황태자로 떠오른 남태희와 아시안컵을 앞두고 신데렐라로 주목받은 이정협이 단단히 '한 건' 해낸 것이다. 이정협은 경기 이후 "운이 좋았다"고 자세를 낮추면서도 "정말 열심히 뛰기는 했다. 이동국·김신욱 형이 다치는 바람에 기회를 잡았을 뿐이지만 형들이 대표팀에 복귀해도 주전 경쟁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막판 신데렐라의 데뷔골로 2골 차 승리를 만들기는 했지만 대표팀은 한 수 아래로 여겼던 사우디를 후반 중반까지 압도하지 못해 걱정을 남겼다. 10일 만날 오만과 13일 2차전에서 상대할 쿠웨이트는 선제골을 일찍 넣지 못하면 '침대축구'로 돌아설 가능성이 크다. 전력상 이기지 못할 바에야 비기기라도 하자는 작전으로 시간 끌기로 일관하는 것이다.
중앙 미드필더 기성용(스완지)과 오른쪽 측면 공격수 이청용(볼턴)이 가세할 오만전부터는 이른 시간에 선취골을 터뜨리도록 경기 템포를 끌어올려야 할 것으로 보인다. 기성용과 이청용은 소속팀에서 늦게 합류해 휴식을 취했다.
경기 후 슈틸리케는 "전반에는 볼 키핑이 좋지 않았다. 전반처럼 공을 많이 뺏기면 수비 조직력 유지에 문제가 생기고 압박에도 문제가 생긴다"며 "전반보다 후반에 훨씬 좋은 축구를 했다. 패스를 효과적으로 하면서 즐거움을 회복했다"고 말했다. 이정협에 대해서는 "적절한 시점에 투입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믿었는데 그 기대대로 골이 나왔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