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소빙기' 덮친 17세기 조선… 어떻게 위기 넘겼을까

농업혁신·빈민구제기구 상설화 등<br>경신대기근 이후 사회·경제사 조명<br>■ 대기근, 조선을 뒤덮다 (김덕진 지음, 푸른역사 펴냄)

▲ 경신대기근때 가축병이 돌아 소가 죽어나가자 농가에서는 사람이 소를 대신 밭을 갈았는데 아홉명의 힘으로 겨우 소 한마리의 일을 해냈다고 전해진다. 사진은 밭을 가는 소를 묘사한 김홍도의 풍속화 '쌍겨리'.

▲의원의 진료를 묘사한 불암사의 '감로탱화'(1890)- 피골이 상접한 사람이 두 의원에게 진료를 받고 있다.


1670년 7월 전국에 때 아닌 우박과 서리에 이어 눈까지 내렸다. 서리가 일찍 내려 추수를 눈앞에 둔 작물이 죄다 말라 죽고, 계란만한 우박이 내려 성한 곡식이 없었다. 기온 하강현상은 혹심한 겨울 추위로 이어졌다. 이듬해에는 심각한 봄 가뭄으로 대지가 타 들어갔다. 농업이 주요 산업이었던 조선은 1670년(庚戌年) 현종 11년 들어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임진왜란, 병자호란으로 어수선해진 나라 사정과 상관없이 몰아친 자연재해로 국운마저 위태로울 지경이었다. 전에도 기근은 간간이 있었지만 이번엔 달랐다. 제주도에서 함경도에 이르는 전국적이고 유례없는 사상초유의 대재앙이었다. 식량은 고갈되고 설상가상으로 전염병ㆍ가축병이 겹쳐 지옥이 따로 없었다. 초근목피마저 바닥이 난 백성은 심지어 인육을 먹고, 부랑자가 돼 길거리를 가득 메웠을 뿐 아니라 기아자들도 속출했다. 민생은 파탄에 내몰렸고 사회는 불안의 늪으로 빠졌다. 조선왕조 실록은 이 사건을 '경신대기근'이라 기록하고 있다. 조선후기 경제사 연구에 매진해 온 김덕진 광주 교육대학원 교수는 역사학자들에게도 인기가 없었던 17세기 조선사를 기후라는 관점에서 접근했다. 또 그는 당시 피해정도를 계량화하고 정치세력의 계보를 작성, 대기근에 반영된 당시의 사회상을 거시적으로 조감했다. 경신대기근은 기후 변화가 불러온 재앙이라고 저자는 추정한다. 17세기 '소빙기'(16~17세기에 지구의 기온이 내려가 빙하 면적과 두께가 넓고 두꺼워진 시기로 빙하기에 비해 규모가 작다고 해서 소빙기라 부름)현상에 의해 벌어진 전 지구적 기후 변화가 조선에도 영향을 주었다는 설명이다. 김교수는 이 사건을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재해석하는데 그치지 않고 어떻게 조정과 백성이 일치단결해 위기를 극복했는지에 집중했다. 조정은 대량 유민 특히 버려진 아이들을 돌보기 위한 법을 제정했으며, 냉해에 대배해 조생종 벼를 개발 보급하는 등 농업 혁신을 시도했다. 임시로 설치됐던 빈민구제기구 진휼청을 상설 기구화 하는 등 사회안전망을 구축에 집중했다. 또 백성 구제에 필요한 재원 마련을 위해 납속(納粟)과 공명첩(空名帖) 발행이 성행하면서 전통적인 신분질서가 무너지고 재력으로 신분을 바꿀 수 있는 세상이 처음 열렸다. 저자는 '위기의 조선 17세기'를 재발견하고, 사회적 충격을 완화하고 새로운 기회를 모색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사람들의 희망과 비전에 집중했다. "17세기는 위기에서 새로운 '블루 오션'을 발견한 '기회의 시대'였다. 그때의 재앙을 슬기롭게 해결하지 못했다면 18세기 영조와 정조의 태평성대는 오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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