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Culture & Life] 이종덕 충무아트홀 사장

미치도록 현장 찾고 공연 즐겨야 문화예술 창조경영 가능하죠

발레 등 매주 서너 편 관람 예술인 생생한 목소리 듣고 수준 높은 공연 만드는데 최선

흥행성 갖춘 창작뮤지컬 제작 라이선스 해외 판매도 추진



"아직도 내게 일거리가 주어지는 것이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여든을 바라보지만 열정과 패기만큼은 여느 청춘 못지않게 뜨거웠다. 이종덕(79·사진) 충무아트홀 사장과 마주 앉은 첫 느낌은 꽤 강렬했다. 인심 좋은 할아버지처럼 푸근한 느낌이다가 문화예술에 대한 소회를 피력할 때는 에둘러 표현하는 것 없이 솔직하고 날카롭게 핵심을 짚었다. 지난 1963년부터 1983년까지 20년간 문화공보부에서 근무했고 예술의전당·세종문화회관·성남아트센터 등 국내 대표 공연장의 수장을 역임한 그는 우리나라 '문화예술경영인 1세대'로 꼽히는 인물이다. 반세기 이상 무대 뒤에서 예술경영자로 삶의 걸음걸음을 내디뎠고 지금도 여전히 현업에서 백전노장(百戰老將)의 투지를 불태우고 있는 그를 새해를 목전에 둔 지난해 12월30일 오후 서울 중구 충무아트홀 집무실에서 만났다.


■파란만장 청년 이종덕

시계추를 되돌려 60여년 전 그때로 되돌아가면 파란만장한 청년 이종덕과 마주할 수 있다.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나 열 살 때까지 일본에서 줄곧 지냈던 이 사장은 일제 식민지 해방 석달 전 고국 한국으로 돌아왔다. 지금은 먼 옛날이야기지만 당시에는 한국말을 구사할 수 없어 학교에서 따돌림을 경험하기도 했다.

"그때는 참 의기소침했죠.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었고, 좀 더 강해지자는 마음으로 중학교 때 유도를 시작했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레슬링도 배웠죠. 그런데 운동을 좀 하다 보니 이제는 거친 사람들과 어울릴 일이 늘어나더군요. 한동안 광화문 거리패들과 친하게 지내던 철없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한때의 치기 어린 실수를 뒤로 하고 그가 문화예술과 처음으로 조우한 것은 1963년. 문화예술계가 불모지나 다름없던 때, 그는 당시 문화공보부 문화과에서 예술행정과 첫 대면을 했다. 50년 지기 벗 김동호 문화융성위원회 위원장과의 인연도 그때 그 시절 시작됐다.

"김동호씨는 정말 뛰어난 관료였죠. 꼼꼼하면서 차분하게 맡은 바 소임을 해내는 실속파였습니다. 반대로 난 주로 외부에서 사람 만나고 관계를 트는 데 능했던 것 같습니다."

이 사장 스스로 말했듯 청년 이종덕은 외향적이고 흥(興)이 넘치는 인물이었다.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상임이사, 88서울예술단 단장, 예술의전당·세종문화회관 등의 최고경영자를 역임하는 등 반백년 공직생활을 이어오면서 그는 각종 사조직을 꾸려 각계각층 인사와 친분을 엮어왔다. 문화인모임 격인 '광화문문화포럼'을 비롯해 '예장로터리클럽'을 만들어 예술인들에게 만남의 장을 마련해주기도 했다. 좋은 사람들끼리 모여 서로 정보를 나누고 여유로운 생활을 하자는 뜻의 '낭만파클럽'도 그의 손에서 창설됐다. 이외에도 이 사장은 원로무용가 고 최현을 기리는 '허행초모임' 등 각종 모임을 만들어 수년간 그 명맥을 이어오며 여러 문화예술인과 교류하고 있다.

■일흔여섯 충무아트홀에서 새 여정

2010년 11월, 그는 성남아트센터 사장을 끝으로 현업에서 물러나기로 마음먹었다. 당시 후배 예술인들의 재능기부로 퇴임식도 꽤나 성대히 치렀다. 그러나 퇴임 두달여 만에 돌연 충무아트홀 사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일면식도 없는 당시 서울 중구청장이 찾아와 수개월째 공석인 충무아트홀 신임 사장 자리를 맡아 달라고 간곡히 청해 쉬이 외면할 수 없었다고 했다.

2011년 1월, 그는 "이곳 충무아트홀에서 공직생활의 마침표를 다시금 찍자"는 마음으로 일흔여섯, 새로운 여정을 시작했다.

이 사장과 충무아트홀의 첫 대면은 그리 유쾌하지는 못했다. " '우리 식구들끼리 한번 잘해봅시다!' 격식 없이 직원들을 마주하고 던진 첫마디였습니다. 한점 부끄러움 없는 진심이었죠. 그러나 처음 와서 의례적으로 건네는 말로밖에 생각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직원들의 눈동자가 다들 흐트러져 있었죠. 당시 풀어야 할 실타래도 참 많았습니다. 직원들은 저마다 개인주의가 팽배했고 노조와 사측의 관계도 원활하지 못했죠. (충무아트홀) 전 직원이 마음을 열고 하나가 되기까지의 반년은 참 힘든 여정이었습니다."

이 사장은 취임 후 가장 먼저 대대적인 인사발령을 단행했다. 각부 부장만 제외하고 공연기획·홍보·행정·문화사업 등 모든 직원이 자리를 옮기도록 했다. 알게 모르게 형성된 조직 안의 계파와 갈등을 없애고 숨겨진 인재를 발굴하기 위해서였다. 힘들었던 것만큼이나 충무아트홀은 빠르게 새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최근 이 사장은 '충무아트홀 창조경영 보고서'를 만들기도 했다. 충무아트홀의 수익구조 개편, 신규사업 신설 등 안정적인 경영환경 조성을 위해 필요한 전략을 담았다. 재정자립도를 높이기 위한 다양한 수익증대 방안에 대한 연구가 보고서의 줄기다.

"2009년부터 2011년까지 3년 동안 구청출연금이 15억원 전후로 2008년의 36억원 대비 50%로 줄었습니다. 자체 재원마련이 시급했어요. 여러 방편이 있겠지만 우선 창작뮤지컬을 자체 제작해 수익구조를 만드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2014년 3월부터 5월까지 충무아트홀 대극장 무대에 오르는 뮤지컬 '프랑켄슈타인'이 바로 그겁니다. 2014년 충무아트홀 개관 10년을 기념해 직접 기획·제작한 창작뮤지컬입니다."

이 사장은 지난 10년 동안 충무아트홀이 축적한 노하우와 네트워크로 뮤지컬을 자체 제작해 창작뮤지컬 콘텐츠를 확보하고 최소 3∼4년에 걸쳐 충무아트홀에서 재공연해 흥행시킨 후 공연 라이선스를 해외시장 등에 판매하는 중장기 전략까지 그리고 있다.

당초 2014년 초에 끝나기로 했던 이 사장의 충무아트홀 임기가 1년 연장됨에 따라 그가 펼치는 청사진의 현실화도 탄력을 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이 사장은 "충무아트홀은 서울 중구 시민이 낸 세금을 가지고 운영되기에 이 지역 거주자에게 문화 만족감을 주는 게 최우선"이라며 "이와 동시에 대한민국 문화 수준을 함께 끌어올릴 수 있는 공연장을 만드는 데 마지막 힘을 쏟고 싶다"고 말했다.

■여전히 한국의 디아길레프 꿈꾼다

이 사장이 말하는 문화예술경영인의 필수덕목은 간결하고 쉬웠다. 그저 미치면 된다. 그는 지금도 영화·발레·클래식 등 장르를 불문하고 시간이 허락하는 한 매주 서너 편의 공연을 관람한다.

"도전·긍정·배려 등은 다른 여타 경영자의 덕목과 크게 다르지 않죠. 한 가지 두드러진 차이점을 꼽자면 문화예술경영은 미치지 않으면 발전이 없다는 겁니다. 예술인과 끊임없이 어울리고 현장의 가장 생생한 소리를 들어야 무에서 유가 창조되죠. 예전에 비해 많이 향상되기는 했지만 아직도 지역 문화예술기관의 장(長)들 중에는 문화예술을 천직으로 알고 힘을 쏟기보다 그저 잠시 거쳐가는 관리직쯤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아요. 이래서는 그렇게 강조하는 문화융성이 뜬구름으로 끝날 가능성이 크죠. 미치도록 문화를 좋아하고 즐겨야 합니다."

이 사장은 러시아 발레를 세계에 알린 발레단 '발레뤼스' 뒤에 세르게이 디아길레프(1872∼1929)라는 빼어난 기획자가 있었던 것처럼 "능력 있는 예술인이 화려하게 꽃을 피울 수 있도록 예술인이 이 땅에서 제대로 존경 받고 대접 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 수 있도록 디아길레프와 같은 명(名)예술행정가를 꿈꾼다"고 했다. 이 사장은 2004년 자신의 저서 '내 삶은 무대 뒤에서 이루어졌다'를 통해 이렇게 말한다.

"요즘도 가끔 조용한 시간에 나 자신을 향해 질문을 던진다. 과연 나는 디아길레프처럼 유명한 스타를 키워냈는가. 고개가 끄덕여지기보다 가로저어지는 쪽이다. 그러나 마음만은 지금도 한국의 디아길레프가 되겠다는 꿈을 꾸고 있다. 나는 아직도 꿈을 꾼다. 한국의 디아길레프가 되기 위해…."

"차라리 내가 손해본다" 반세기 무대 뒤 인생 조명

후배들 21일 헌정출판기념회

" '따지지 않는다'는 것과 '차라리 내가 손해 본다'는 슬로건은 그의 인품을 잘 드러낸다. 남을 배려하고 봉사하며 복잡한 일을 대할 때는 오히려 바보스럽게 행동하며 풀어나간다는 게 그의 소신이다. 그렇게 쌓인 인생이 그에게 '공연계의 대부'라는 평가를 안겨줬다. 이런 사람과 반세기 이상 교분을 쌓았으니 나에게는 크나큰 행운이 아닐 수 없다. 그와 사귄다면 겸양과 겸손·솔선수범의 향기에 취해 그와 같은 사람으로 변해버린다."


김동호 문화융성위원회 위원장이 말하는 50년 지기 나의 벗(友) 이종덕에 대한 평가다. 김 위원장의 말대로 바보스럽게 반세기를 무대 뒤 문화예술경영자로 살아온 이종덕 사장에게는 어느 것과도 쉬이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인적 자산이 있다. 예술의전당·세종문화회관·성남아트센터 등 국내 대표 공연장의 사장을 지내며 얻게 된 예술행정 분야 전문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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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건 KBS 교향악단 사장, 안호상 국립극장장, 이창기 강동아트센터 관장 등 현재 국내 대표 2세대 문화예술경영자인 이들은 모두 이 사장 밑에서 경력을 쌓아 현재 활발히 현업에서 몸소 뛰고 있는 인물들이다.

이들은 자신이 걸어갈 길을 먼저 밟아온 선배 이종덕을 위해 그의 문화예술경영 50주년을 기리는 이례적인 잔치를 준비하고 있다. 오는 21일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열리는 헌정출판기념회다. 발간될 책에는 이 사장이 문화예술경영인으로서 걸어온 무대 뒤 50년 인생은 물론 박 사장, 안 극장장 등 후배들이 풀어놓는 살아있는 문화예술경영 노하우도 함께 담길 예정이다.

후배들이 직접 정성스레 마련한 뜻깊은 잔치를 앞두고 이 사장은 "열악했던 예술행정의 현장에서 오랜 시간을 함께 한 후배들이 출판기념회를 열어줘 더욱 감격스럽다"고 했다.

"2세대 문화예술경영인이 보다 나은 환경에서 마음껏 꿈을 펼칠 수 있도록 마지막 눈을 감는 그날까지 그 길을 먼저 걸어온 선배로서 소임을 다하겠다"는 그는 "죽는 날까지 예술가를 후원하고 사람을 키우는 데 온 힘을 쏟겠다"고 했다.

He is…

△1935년 1월 일본 오사카

△1955년 경복고

△1960년 연세대 문과대학 사학과

△1963년 문화공보부

△1981년 11월∼1983년 2월 문화공보부 정책연

구관(국장급)

△1983년 3월∼1987년 8월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상임이사·기획이사

△1986년 연세대 행정대학원 고위정책과정

△1989년 3월∼1995년 3월 서울예술단 이사장

△1995년 3월∼1998년 4월 예술의전당 사장

△1999년 7월∼2002년 6월 세종문화회관 사장

△2001년 서강대 영상대학원 CEO PI전략과정

△2004년 12월∼2010년 12월 성남아트센터 사장 △2011년 1월∼ 충무아트홀 사장

△2013년 단국대 명예박사

<주요 상훈>

△1973년 근정포장(박정희 대통령)

△1994년 옥관문화훈장(김영삼 대통령)

△2009년 보관문화훈장(이명박 대통령)

△2010년 한국문화예술교육총연합회 '문화경영

명인상' 수상

사진=김동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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