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곳은 어느 주머니에 넣어도 비집고 나오게 마련이다. 인재 역시 송곳과 같아 잘 눈에 띄면서 중용되는 게 인간사다. 필자가 반기문 장관을 만난 것은 20여 년 전인 80년대 초 외교부(당시는 외무부)를 출입하면서다. 사람 보는 눈이 뛰어난 노신영 장관이 그를 요직인 UN과장에 기용했다. 냉전시대 남북 표 대결이 연례행사였던 당시 UN은 우리의 사활적 이해가 걸린 외교무대였다.
반 장관을 가까이서 접하게 된 계기는 노 장관이 안기부장을 거쳐 총리로 왔을 때다. 노 총리는 그를 의전비서관으로 불렀다. 총리실을 출입했던 필자는 노 총리를 뵈려면 그의 방을 거쳐야 했고 또 더러는 노 총리의 부름을 그가 대신 전해주기도 했다.
반 장관에 대한 필자의 인상은 우선 그가 전형적인 외유내강형이라는 점이다. 글자 그대로 외양은 부드러운듯 하나 속은 무쇠같이 단단하다. 그가 북미국장시절 송민순 북미과장(현 1차관보)과 함께 미국측과의 SOFA(주둔군지위협정)협상 때 보인 뚝심은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독일사람과 한국사람이 뭐가 다르냐”며 미국측을 욱박지르는 송 과장을 말리는 척 하면서 뒤에서 등을 두드리는 그의 리더십이 독일형 이상으로 업그레이드된 SOFA를 낳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차관 때인 2000년 말께의 일로 기억한다. 김대중 정부의 개방 정책에 따라 외교부도 고위직 두 자리를 일반에게 개방했다. 외교관 수준의 인사를 찾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외교부의 경우 대개 ‘내부잔치’로 끝나기 일쑤였다. 마침 문화외교국장에 주미 공보공사 등을 지낸 언론출신 인사가 응시를 했다. 그러나 그는 고향에서 야당공천으로 국회의원에 출마, 낙선 경험을 갖고 있었다.
외부심사위원으로 윤영관(서울대), 문정인(연세대), 필자 등 세 사람이었고 반 장관은 심사위원장이었다. 필자가 외교부가 ‘집안잔치’라는 오명을 벗을 호기라며 그를 추천하자 두 분도 동의했다. 그러면서도 괜히 반 장관을 곤혹스럽게 하지 않을까 내심 걱정도 했다. 그의 대답은 의외로 “위원님들이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지요”였다. 예상대로 청와대 결제과정에서 그는 탈락했다. 아마 반 장관이 결제라인으로부터 싫은 소리를 들었을 게 분명하다. 그래도 그는 원칙을 지키려는 뚝심과 배포가 있었다.
외람된 표현일지 모르나 그는 개인적으로는 불운한 외교관이다. 외교관은 해외근무에서 꽃을 피운다. 역대 정부가 그를 곁에 두려 붙잡는 바람에 해외근무 기회가 상대적으로 줄었다. 아마도 직업외교관 출신 장관 가운데 공관장 경험이 단 한차례(오스트리아대사 1년7개월)뿐인 사람은 그가 처음이다. 그러나 외교수장으로서 혹은 주요직책을 통해 축적된 그의 소중한 경험이 언젠가는 국제무대에서 국익을 위해 활짝 꽃 피울 날이 꼭 있으리라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