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정성의 원리'
이는 모든 것이 빈틈없는 인과관계에 얽매여 있어 원인에서 결과까지 필연의 각본 하에 움직인다는 인과율의 논리에 치명상을 입힌 하이젠베르크의 이론이다.
왜 갑자기 물리학 이론이 떠오를까.
최근 막을 내린 장상 총리 지명자에 대한 국회 인사청문회.
이 한편의 드라마는 그간 '짜고 치는 고스톱'에 익숙했던 기자에게 '설마'의 위력을 확인시켰다. 여성 총리가 임명되면서 '누가 그를 거부하리요'하는 상식적인 셈법이 여지없이 빗나갔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썩 기분이 나쁘지 않다.
입법부와 행정부가 서로 견제를 통해 균형을 추구한다는 것은 민주주의 상식이다.
하지만 이 상식은 그간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식'으로 처리됐던 숱한 사례들 앞에서 한낱 '잠자는 교리'였을 뿐이었다.
그래서 일까. 장상 총리서리를 인사 청문회에서 낙마시키는 것은 결론이 정해진 정치적 각본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인식됐다. 때문에 의원들이 '양날의 칼'이 될 수도 있는 인준부결을 행사하긴 어려울 것이란 예상이 대세였다. 이것이 바로 여태껏 절차와 과정을 홀대해 온 우리 정치의 현주소이자 냉소어린 진단이었다. 그런데 그게 깨진 것이다.
이렇게 되니 올곧은 의미의 절차가 되살아 난다. 이번 청문회는 고위 공직자에게 요구되는 도덕적 '마지노선'을 제시하는 계기가 됐다.
위장전입 논란에서 자기 책임 대신 시어머니로 돌리는 '면피성 당당함'이 인준 불가로 '단죄'된 느낌이 든다. 이번 청문회는 요식적 흠집내기로 그치지 않았다.
물론 각 당은 벌써부터 인준 부결의 책임을 서로에게 돌리느라 여념이 없다. 스스로 만들어낸 현실이 믿기지 않는 모양이다. 청와대는 그들대로 후임총리 인선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하지만 어떤 카드를 내놓든지 간에 예전처럼 '과정이 거세된 결과'를 맹신하기 힘들게 됐다. 이번 청문회의 가장 큰 수확이다.
이제 정치권은 제2라운드에 본격적으로 접어들었다. 총리직 공백에 따른 국정의 파행운영을 방지해야 한다며 서리제도를 놓고 위헌성과 불가피성으로 전선을 형성하고 있는 상태다.
성급한 결론으로 내몰 정치공방보다는 심도있는 논의의 과정을 거치길 바란다. 이번 청문회를 통한 값진 경험에서 보듯 과정의 '루비콘강'은 생각보다 넓고 깊지 않은가.
이상훈<정치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