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산업일반

시속 300~400㎞로 실제처럼 전투비행

실물 완벽 재현 1,200만원짜리 장난감 제트기… 톱클래스 마니아 120개팀 출전…100여대 항공기 한판승부… 수 천만원 들여 1년내내 준비"우승하면 올림픽 金보다 영광"… 고난도 공중기동·폭탄 투하 모습 선보여 탄성 자아내기도

A-10 실물 항공기를 5.5대1의 비율로 축소한 A-10 워트호그. 오른쪽부터 마이크 셸비, 레이 존스, 폰차이 새코어, 빌 데이비슨.


모형항공기 A-10 워트호그(아래)와 실물항공기 A-10 (위)

최근 미국 플로리다에서 세계 최고 권위와 규모를 자랑하는 무선조종(RC) 모형항공기 경진대회인 ‘톱건(Top Gun)’이 개최됐다. 이 대회의 우승을 위한 제1 조건은 사실성. 출품작들은 외관ㆍ도장상태ㆍ비행능력 등 모든 면에서 실물 비행기를 완벽히 재현해야 한다. 제트기의 경우 시속 300~400㎞에서 임멜만 기동, 스플릿 S기동, 롤링 등 고난도 비행기술 구현이 필수다. 이 때문에 전세계 RC 모형항공기 마니아 중 최고의 톱 클래스에게만 참가자격이 주어진다. 이들에게 톱 건에서의 우승은 평생의 숙원이자 영광이다. 내일의 톱 건을 꿈꾸는 RC 모형항공기 마니아들의 세계로 들어가보자. ■ 톱건의 꿈을 향한 도전 지난 4월25일 미국 플로리다주 레이크랜드 인근의 린더공항. 이른 아침의 정적을 깨고 1만여명의 사람들이 속속 활주로 인근에 자리를 잡는다. 한 쪽에 마련된 격납고에는 100여대가 넘는 군용 전투기와 민간 항공기가 출격을 준비하고 있다. 언뜻 보면 영락없이 국제 에어쇼를 앞둔 행사장의 분위기다. 하지만 활주로에는 멋진 복장의 파일럿 대신 무선 조종기를 목에 건 사람들이 이리저리 바쁜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자세히 보면 격납고의 항공기들도 가장 큰 것이 3~4m에 불과하다. 사실 이곳은 세계 최대 규모의 무선조종(RC) 모형항공기 경진대회인 ‘톱건 2008(Top Gun 2008)’의 경기장이다. 올해로 20회를 맞은 이 대회에는 총 120개 팀이 자신들이 손수 제작한 모형항공기를 들고 마스터스ㆍ팀ㆍ전문가ㆍ프로ㆍ아마추어 등 5개 부문에서 자웅을 겨뤘다. 명실 공히 세계 최고의 RC 모형항공기를 가리는 수준 높은 대회이니만큼 참가자격은 기술력과 자금력을 갖춘 톱 클래스의 마니아들에게만 주어진다. 소형 모형항공기에 제트엔진을 장착하는 등의 기술은 일반 동호인들이 결코 구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톱건에 출전하는 마니아들에게 RC 모형항공기는 단순한 취미생활이 아니다. 삶의 한 부분과 다름없다. 엄청난 상금도, 세계적인 명성을 얻는 것도 아니지만 기꺼이 수천만원의 자비를 들여가며 1년 내내 대회를 준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들에게 톱건에서의 우승은 올림픽 금메달을 능가하는 가문의 영광이자 평생의 숙원이다. ■ 1,200만원짜리 장난감 항공기 현재 태국 왕가의 자산관리 책임자로 있는 마이크 셸비도 그 중 한 사람. 그는 자신이 원하는 기체를 마음껏 만들기 위해 태국 방콕에 PST 엔진스라는 모형 제트기 제조회사를 설립했을 정도의 골수 마니아다. 이번 대회에서는 무선조종을 담당한 현직 미 공군 중장 레이 존스, 정비를 담당한 미 공군 장관의 행정보좌관 빌 데이비슨, 모형 제트기 제작 전문가 폰차이 새코어 등과 함께 팀 부문에 출전했다. 지난해 브라질제 EMB-312 투카노를 가지고 결승에서 아쉽게 패했던 그가 올해 우승을 목표로 꺼내든 비장의 카드는 바로 A-10 워트호그. 최초의 지상군 근접지원용 제트기인 미 공군의 A-10 선더볼트Ⅱ를 5.5대1의 비율로 축소한 모델이다. 이를 위해 셸비는 총 1만2,000달러를 들여 날개 폭 3m, 중량 30㎏, 항속시간 15분의 이 모형항공기를 직접 설계ㆍ제작했다. 동체는 고강도 유리섬유와 탄소섬유, 케블라 섬유를 사용했다. 또한 내부에 3개의 마이크로프로세서, 컴퓨터로 제어되는 서보모터(servo motor) 24개, 자이로스코프 2개 등을 장착해 섬세한 비행능력을 확보했다. 특히 분당 회전 수 12만회, 추력 13.16㎏의 제트 터빈엔진 2기를 사용해 최고 시속이 무려 320㎞에 달한다. 날개 아래쪽에는 실제 공중투하가 가능한 모조 폭탄 4발도 부착돼 있다. 취미로 만든 장난감 항공기라기보다 고성능 무인항공기(UAV)에 가까운 수준이다. A-10 워트호그가 방콕에서 시험비행을 시작한 지난해 5월부터 일찌감치 우승 후보로 지목 받았던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A-10 워트호그의 최대 강점은 이 같은 막강한 성능이 아니다. 모형항공기 마니아들을 열광시켰던 진짜 이유는 극도의 현실성에 있다. ■ 실물 항공기의 완벽한 재현 톱건의 모든 참가자, 특히 팀 부문의 참가자들은 특정 기종뿐만 아니라 그 기종의 특정 기체를 선택해 재현해야 한다. F-18 슈퍼 호넷을 모델로 했다면 보잉의 F-18이 아니라 미군 A 기지에서 B 파일럿이 조종하는 F-18을 완벽히 축소해내야 한다는 얘기다. 심사위원들이 우승자를 가리는 제1 기준이자 유일한 기준이 바로 사실성인 탓이다. 이 점에 있어 A-10 워트호그는 완벽 그 자체다. 셸비는 노스캐롤라이나주 포프 공군기지의 PJ존슨 대위가 모는 A-10을 모델로 삼았는데 동체에 생긴 작은 흠집까지 정확히 재현해냈다. 조종석 안에는 존슨 대위를 꼭 닮은 밀랍 인형도 넣어 사진으로는 전문가들조차 실물 항공기와의 구분이 어려울 정도다. 외관만이 아니다. A-10 워트호그는 비행 특성 또한 실물 항공기와 동일하다. 셸비는 “실물 항공기가 300노트에서 폭격 항정을 한다면 모형항공기도 그와 유사한 속도로 폭격 항정을 해야 한다”며 “전투기처럼 날렵하게 선회할지, 폭격기처럼 육중하게 선회할지도 모두 실물 항공기의 비행 특성에 맞춰야 한다”고 설명했다. 사실 실물 항공기와 전혀 다른 소재ㆍ크기ㆍ중량ㆍ엔진을 가진 모형항공기로 실물 항공기와 똑같은 비행 특성을 구현하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추력 대비 중량 비율, 양력 대비 중량 비율, 이착륙 속도 등이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추락이나 실속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셸비는 PST엔진에서 개발한 초정밀 디지털 연료제어장치, 최신 에어포일(airfoil) 분석 소프트웨어, 미 항공우주국에서 사용하는 듀얼 무선수신시스템 등을 활용해 저공ㆍ저속에서도 탁월한 기동성을 발휘하는 A-10의 까다로운 비행 특성을 성공적으로 모형항공기에 이식했다. ■ 최고수들의 진검 승부 톱건 대회의 창시자인 프랭크 티아노에 따르면 전세계 2,000여명의 정상급 RC 모형항공기 마니아 중 단 10%만이 자신이 만들고자 하는 기체의 제작능력을 갖고 있다. 이 중에서 셸비처럼 톱건의 역사에 남을 모델을 만들어내는 사람은 단 20여명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번 대회에 바로 이들 대부분이 참가한다. 최고수들만의 진검 승부가 펼쳐지는 셈이다. 이 때문에 예년과 마찬가지로 사소한 실수 하나가 우승 트로피의 향방을 가를 것이 자명하다. 셸비와 그의 팀원들이 지난 10개월간 모든 주말을 포기해가며 500여시간의 시험비행을 거친 것도 현장에서의 실수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다. 셸비는 대회 직전 A-10 워트호그의 최대 경쟁자로 미 육군 특수부대 출신의 월트 플레처와 아메리칸항공에서 보잉747 조종사로 재직 중인 데이비드 위글리, 그리고 지난해 팀 부문 준우승자인 데이비드 슐먼을 꼽았다. 이중 플레처는 1차 세계대전의 최고 에이스였던 독일의 리히트호펜 남작이 조종한 포커 드라이데커, 위글리는 4년의 공을 들여 완성한 1950년대 영국 해군 전투기 웨스트랜드 와이번을 들고 나왔다. 그리고 슐먼은 지난해의 F-86 세이버를 버리고 F-16C 파이팅 팔콘으로 출사표를 던졌다. 이외에도 중량 11㎏의 미그-15기를 출품한 조니 헤르난데즈, 터빈엔진 추력이 23㎏에 이르는 조르게 에스칼로나의 F-18 슈퍼 호넷, 시속 320㎞의 속도를 자랑하는 팀 리델만의 F-4 팬텀 등도 A-10 워트호그가 넘어야 할 산이다. ■ 결전의 날, 아쉬운 승리 결전의 날이 밝아오고 120대의 모형항공기가 차례로 활주로를 이륙, 자신의 역할에 맞는 비행 능력을 선보였다. 공격용 제트 전투기들의 경우 최대 400㎞를 넘나드는 속력을 과시하며 임멜만 기동, 스플릿 S기동, 배럴 롤 기동 등 적기와의 교전 때 사용하는 고난도의 공중 기동을 선보였다. 특히 A-10 워트호그를 비롯한 몇몇 기종들은 폭격 항정 중 폭탄(어뢰) 투하, 플레어(대공미사일 교란물질) 투하 등을 실물 항공기와 똑같은 모습으로 재연해내면서 탄성을 자아내기도 했다. A-10 워트호그의 출발은 기대 이상으로 좋았다. 대회 첫날 외관 채점에서 100점 만점에 99.667점을 획득, 전체 출전 기체 중 1등을 차지한 것이다. 이는 역대 톱건 역사상 가장 높은 점수였다. 다음날 벌어진 1차 비행 테스트에서도 A-10의 비행 특성을 완벽히 재연한 비행으로 찬사를 받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우승은 A-10 워트호그의 몫이 분명해보였다. 하지만 마지막 2차 비행 테스트에서 문제가 일어났다. 이륙 후 바퀴가 접히지 않으면서 기어의 공기압축시스템에 작은 구멍이 발생, 정상적 비행이 불가능해진 것. 결과는 A-10 워트호그를 바짝 추격했던 슐먼의 F-16C의 극적인 역전승. 점수 차는 0.858점에 불과했다. 비록 우승은 못했지만 셸비의 노력이 헛된 것은 아니었다. A-10 워트호그가 베스트 군용기상, 베스트 제트기상, 심사위원상 등 8개 본상을 휩쓸며 대회 최강자의 반열에 올랐기 때문이다. 셸비는 “고장만 아니었다면 우승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다소 아쉬움이 남지만 A-10 워트호그의 비행 능력에 더없이 만족한다”며 “내년에는 반드시 패권을 차지할 수 있도록 지금부터 철저한 준비를 해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