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Culture & Life] 피아니스트 김선욱

반짝 빛나기보다 오래도록 울림있는 연주 꿈꿔요<br>한국선 강박관념 시달렸지만 영국 유학하며 참된 나 돌아봐<br>지금은 피아노 연주에만 집중… 지휘자 김선욱은 좀 더 고민할 것

사진제공=LG아트센터

사진제공=LG아트센터

점퍼에 편한 청바지 차림, 허세 없이 소탈했다. 질문을 건네면 한번 더 의미를 곱씹고 본인의 생각을 정확한 단어로 솔직하게 표현하고자 노력하는 모습이 퍽 인상적이었다. 영재' '국내파 천재 피아니스트' 등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는 화려했지만 연신 "특별할 것 없다"고 말하며 자신을 낮췄다. 피아니스트 김선욱(25·사진)과 마주한 첫 느낌이다.

3세 때 피아노를 시작해 10세 때 금호문화재단(현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 영재 시리즈로 데뷔한 그는 2006년 18세 때 세계적 권위를 가진 영국 리즈(Leeds)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40년 콩쿠르 역사상 최연소, 아시아인 최초 우승이었다. 김선욱은 늘 또래에 비해 뭐든 빠르고 최고였다. 국내는 물론 세계 음악계가 그를 주목했고 정상급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은 물론 대중적 인기도 뒤따랐다.


강하고 유연한 손놀림과 풍부한 표현력, '젊은 거장'이라는 표현이 손색없는 김선욱은 지난해 새로운 도전을 시작해 화제를 모았다. 32개의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을 곡 출판 순서대로 짚어가며 2년 동안 총 8회에 걸쳐 완주하겠다는 목표였다. 지난해 총 4회 중 세 번의 공연을 전석 매진시킨 그는 대장정의 마침표를 찍기 위해 올해도 도전을 이어간다. 베토벤의 음악인생을 따가라며 자신의 나이테도 조금씩 넓혀가고 있는 김선욱이다. 13일의 '베토벤 소나타 전곡 연주' 프로젝트 다섯번째 무대를 앞두고 그를 만났다.

◇ 베토벤을 숭배한 청년

김선욱의 '베토벤 사랑'은 유별나다. 2006년 리즈 콩쿠르 최연소 우승 당시 그는 베토벤의 마지막 소나타를 들고 나갔다. 2009년에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재학 당시 스승이었던 김대진 교수의 지휘로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전곡(5곡)을 하루에 완주했다. 그는 지난해 7월 헝가리 출신 피아니스트 안드라스 시프가 베토벤하우스(베토벤의 생가)에서 1주일간 진행한 마스터클래스에서 역시 베토벤의 마지막 소나타를 연주했다. 이를 계기로 그해 12월 베토벤 탄생일을 기념해 열리는 베토벤하우스 음악회에 초청받는 영광을 얻기도 했다. 베토벤에게 열렬한 사랑을 표하는 남다른 이유가 궁금했다.

"악기를 통한 음악의 역사를 볼 때 베토벤 전과 후로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한 작곡가입니다. 베토벤 때문에 낭만음악으로 흐름이 자연스레 바뀌고 한정됐던 음악구성 기법도 베토벤 때문에 더 넓어진 측면이 있다고 생각하고요. 후대 음악가 중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은 작곡가가 없을 정도로 혁신적인 음악가입니다. 드라마적 요소로 봤을 때도 베토벤 만한 작곡가가 드물죠. 또 지금 피아노로 할 수 있는 기법들이 베토벤 곡에 총망라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단순히 열렬히 사랑해서라는 이유보다 베토벤 곡을 배우고 연주하는 것은 모든 음악가의 기본이라고 봅니다. 그 기본을 제대로 알고 이해해야 비로소 (음악가로서) 다음 챕터(chapter·장)를 펼쳐 보일 수 있죠."

그의 말대로 '기본'을 알기 위해 시작한 '베토벤 소나타 전곡 연주 프로젝트'도 올해 11월 종지부를 찍는다. 김선욱은 "마지막 연주가 끝나면 비로소 베토벤 음악의 정수를 어떻게 관객에게 제대로 전해 꾸밈없는 감동을 선사할지 새로운 혜안이 생겨날 것 같다"고 했다. 베토벤의 세계에 한 걸음 다가서면 그의 다음 여정은 슈베르트가 될 것 같다.

"베토벤의 곡이 현실적 느낌이라면 슈베르트는 순수 그 자체죠. 연주하고 있으면 마치 하늘 위를 나는 기분이 듭니다. 클래식에 조예가 깊지 않아도 슈베르트 곡을 들으면 모두가 자연스레 동화되죠. 들을수록 매력은 더욱 증폭되고요. 개인적으로는 슈베르트 곡이 그래서 더 어렵게 다가옵니다. 베토벤이 많이 연습하면 그에 따른 성취감을 맛볼 수 있는 곡이라면 슈베르트는 그와 다른 결입니다."

◇ 참된 '나'와 마주한 영국유학 생활

그간 해외유학 없이 순수 국내파로 명성을 쌓아간 김선욱은 2008년 영국에 근거를 둔 클래식매니지먼트 회사인 아스코나스홀트와 전속계약을 맺고 그해 여름 주무대를 런던으로 옮겼다. 클래식의 원류인 유럽에서의 생활은 단순히 연주 기량 향상을 넘어선 가르침을 그에게 안겨줬다.

"본래 제가 가진 능력보다 더 좋게 평해주시는 분들이 참 많았죠. 포장이 많았습니다. 그 시간에 한국에 있었더라면 아마 제 자신을 미처 둘러볼 겨를이 없었을 거예요. 예전에는 그저 음악가가 가장 잘났고 특별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엄청난 강박관념도 뒤따랐죠. 하지만 영국에 머물면서 많은 걸 내려놓고 평범한 삶을 살아가게 되더라고요. '나'라는 사람을 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오롯이 음악에 충실할 수 있었습니다."

김선욱은 2010년 가을 영국 왕립음악원에서 지휘공부를 시작했다. 다음달 시험을 통과하면 석사 학위를 받게 된다. '지휘자 김선욱의 무대를 곧 볼 수 있는 거냐'는 물음에 그는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정명훈 선생님(서울시립교향악단 예술감독)도 피아니스트로서의 경력을 모두 접어두고 지휘자로 새롭게 시작하셨습니다. 피아노와 지휘 두 가지를 병행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죠. 사실 석사 학위를 받으면 다음 단계인 어시스티브컨덕터(assistive conductor·보조지휘자) 일을 찾아 활동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피아노 연주에 지장이 있게 마련이죠. 지금은 피아노 연주에 중점을 두고 있는 상황이라 지휘자 김선욱은 좀 더 시간을 두고 고민해야 할 부분인 것 같습니다."

"거대한 집합체를 움직이는 것 자체가 새롭고 놀라운 경험이었다"는 김선욱은 지휘를 통해 본인조차 몰랐던 또 다른 자신의 잠재력을 끌어내고 있는 듯 보였다.

"제 성격은 어느새 피아노에 길들여져 있는 상태였죠. 사람들 앞에 서서 지휘하는 것 자체가 처음에는 정말 힘들었습니다. 시행착오조차 하나의 과정이라 생각하고 지휘를 통해 소통하는 즐거움을 배우고 있습니다."

◇ 진짜 행복, 그리고 음악

어쩌면 일찍부터 김선욱을 '젊은 거장'이라 칭하며 쏟아낸 세간의 관심이 그에게는 다소 버거운 부담으로 다가올 수도 있겠다. 이제 스물다섯, 지나온 날보다 앞으로 풀어내야 할 이야기와 들려줄 연주가 무궁무진한 청춘(靑春)이기에 말이다. 거의 모든 질문에 답하면서 끝에는 "특별하지 않다"고 습관적으로 내뱉는 김선욱은 '스타 피아니스트'로서 구름 위를 걷는 영광보다 두 발로 굳건히 땅을 딛고 평범하지만 오래도록 기억될 '울림 있는 피아니스트'를 꿈꾸고 있었다.


"지난 1~2년을 빠르게 되짚어보면 연주실력은 확실히 향상된 것 같습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제가 원하는 연주에는 아직 다다르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에는 그저 무대에 오르는 게 좋았고, 관객의 갈채가 좋았고, 세간의 관심 덕분에 매체 인터뷰를 하며 제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는 것 자체가 좋았습니다. 요즘은 이런 것에 관심이 하나도 없습니다. 오로지 어떻게 하면 '완벽한 연주'를 할까 늘 고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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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욱이 말하는 '완벽한 연주'는 "반짝 빛나기보다 진중하고 은은한 음악으로 교감하는 것"이다. 어떤 행위나 말이 아닌 음악이라는 것 하나로 뭇사람들에게 원초적인 감동을 전하는 것, 음악이 지닌 신비한 마법을 널리 전하려는 것. 그것이 음악을 뼛속 깊이 사랑하는 '젊은 거장' 김선욱이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는 이유다.

He is…

▲1988년 서울 ▲3세 때 피아노 시작 ▲10세 때 금호문화재단(현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 영재 시리즈로 데뷔 ▲한국예술종합학교 기악과 학사 ▲현재 영국 왕립음악원 지휘과 재학 중

■주요 수상경력

▲2004년 독일 에틀링겐 콩쿠르 우승 ▲2005년 대원예술인상 ▲2005년 스위스 클라라 하스킬 국제피아노콩쿠르 최연소 우승 ▲2006년 제15회 영국 리즈 국제피아노콩쿠르 아시아인 최초 우승 ▲2006년 유네스코 올해의 인물 선정 ▲2007년 제3회 금호음악인상 ▲2009년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음악부문상






베토벤 삶·음악 궤적 좇아… 소나타 전곡 연주 도전 '젊은 거장'

김민정기자

인생이 한편의 드라마와도 같은 작곡가 루드비히 판 베토벤(1770~1827). 그는 작곡인생 전체에 걸쳐 피아노 소나타 32곡을 만들었다. 베토벤의 초인적 예술세계가 물씬 묻어나는 32개의 피아노 소나타 전곡 연주는 거장 피아니스트들에게도 쉽지 않은 도전이다. 국내에서는 피아니스트 백건우(67)와 최희연(45) 서울대 교수에 이어 김선욱(25)이 그 뒤를 잇고 있다.

김선욱은 지난해 4회 공연에서 16개 곡을 연주한 데 이어 올해도 총 네 차례에 걸쳐 17∼32번을 들려줄 예정이다. 김선욱은 13일 서울 역삼동 LG아트센터에서 17번 '템페스트'를 시작으로 21번 '발트슈타인'까지 연주한 뒤 6월20일 22∼26번, 9월14일 27∼29번, 11월21일 '후기 피아노 소나타' 등 세 곡을 연주하며 2년여의 긴 여정을 마무리한다.

관객에게 잘 알려져 익숙한 곡과 그렇지 않은 곡을 적절히 섞는 보통의 베토벤 소나타 연주회 프로그램과 달리 곡 출판 순서대로 1번부터 차례대로 연주하는 게 '김선욱의 베토벤 대장정'만이 가진 특징이다. '베토벤의 삶과 음악의 궤적을 진지하게 따라가며 32개의 소나타 하나하나에 숨결을 불어넣고 싶었다'는 이유에서다.

지난해 베토벤 초기 소나타까지 연주를 마친 김선욱은 베토벤의 결연함이 두드러지는 중기 소나타, 귀가 완전히 들리지 않는 상태에서 만들어낸 후기 소나타 연주를 앞두고 있다. 그는 "사람이 태어나고 자라고 늙어가면서 후에 죽음을 맞는 것이 자연스럽듯 베토벤의 음악도 해마다 지속적으로 자연스레 변하는 것 같다"며 "특히 후기 소나타는 귀가 들리지 않는데도 완벽에 가까운 곡을 만들었기에 연주하면서도 '짠한'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그는 또 "(개인적으로) 소나타 21번 '발트슈타인'은 구성의 완성도에서 정점을 찍은 곡 같다. 그 뒤부터는 마치 해탈의 경지에 다다른 듯한 음악 그 이상의 무엇을 선사한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베토벤의 걸음걸음을 충실히 따라가는 '젊은 거장' 김선욱의 의미 있는 여정의 피날레가 기대된다.



김민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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