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이 충격적인 재신임 발언을 하던 지난 10일.
재계에는 “정치 때문에 못해먹겠다. 올 장사는 다 했다”는 식의 불만 섞인 발언이 쏟아져 나왔다. 겉으로는 “국정 혼란이 최소화하길 바란다”라며 점잖게 수위를 낮췄지만, 현 정국에 갖는 불만은 절정으로 치닫는 듯했다.
그런데 이날 오후 만난 모 그룹의 한 고위 임원은 “정말 힘드시죠”라는 기자의 질문을 비웃기라도 하듯, 다소 뜻밖의 발언을 이어갔다.
그는 대뜸 “재계는 뭐 잘한 일이 있습니까 ”라는 말부터 꺼냈다. “요즘 정치 상황을 보면 화가 나기는 하죠. 하지만 우리도 그리 할말이 많지는 않습니다. 경제 단체들이 그 동안 해 온 일은 `외환위기 이후 최악이다. 40년 만에 최악이다`라며 위기를 조장해온 일 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의 발언의 수위는 점점 높아졌다.
“`경제는 심리`라는 것은 상식입니다. 그런데 내수를 살려야 한다는 한다는 사람들이 경제 위기가 심각하다는 말만 계속하면 일반인들이 어떻게 지갑을 열겠습니까.”
30분 여에 걸친 대화 후 올 초로 시계를 돌려 보았다.
경제 단체들은 새 정부 출범 후 강력한 개혁 조치에 대한 방어 논리로, 때론 규제 완화를 이끌어 내기 위해 정부에 대한 자극적인 비판을 계속 해왔다. 사석에서 만난 일부 사람들은 정부 고위 관료를 향해 극단적인 표현도 서슴지 않았다. 언론들도 그 순수성 여부를 떠나, `경제 살리기`라는 명제에 가위 눌린 채 재계의 입장을 나팔수마냥 전달해 왔던 게 사실이다.
물론 정부에 대한 비판으로 재계가 얻은 것도 있다. 공정거래위원회의 서슬 퍼런 개혁의 칼날은 재계의 `울음` 속에 상당 부분 무뎌졌고 철옹성 같았던 수도권 총량제도 조만간 열린다.
이런 상황에 비춰 본다면 이 인사의 말은 우리 기업인들 사이에 깔려 있는 일반론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하지만 재신임 정국까지 치 달은 지금, 재계 스스로도 걸어온 궤적을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경제위기에 대한 자극적인 문구가 오히려 위기를 조장하는, 재계 스스로 발목을 잡는 부메랑의 상황은 없었던가.
15일 만난 한 재계 원로의 말이 새삼 가슴에 와 닿는다.
“재계와 노조, 정부가 서로의 폐부를 향해 칼날을 겨누는 상황을 6개월만이라도 중단했으면 합니다.”
<김영기기자(산업부) young@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