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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제 '피서산장' 지어 정기 방문 유목 민족 다독이며 '휴양지 정치'

■ 열하일기의 무대 청더


베이징에서 동북쪽으로 250㎞ 정도 떨어진 곳에 청더(承德)라는 도시가 있다. 교통 사정이 그다지 좋지 않아 차로 4시간 가까이 걸린다. 현행 행정구역상으로는 허베이성(河北省)에 포함돼 있지만 분명히 만리장성 이북의 유목지역에 속하는 도시다. 청나라 시대에는 '열하(熱河)'로 불린 곳으로 조선조 연암 박지원이 이곳을 방문하고 '열하일기'라는 책을 남기기도 했다.

중국사에 조그만 시골 마을에 불과했던 열하가 거대 도시로 바뀐 것은 청나라 황제들의 제국운영 정책 때문이다. 이곳에 황제의 행궁을 건설하고 주기적으로 머물렀던 것이다. 핑계는 여름철 더운 베이징을 벗어나 북쪽 서늘한 곳에서 여름을 보낸다는 것이다. '뜨거운 강'이라는 이름 그대로 열하에는 온천수가 있어 건강관리에도 좋았다. 만리장성 포기를 공식적으로 선언한 강희제는 1703년 이곳에 행궁을 처음 만들고 '피서산장(避暑山莊)'이라고 이름 붙였다.

하지만 더 크고 중요한 목적이 있었다. 만주족 황제는 자신이 끌고 중국 내지로 들어온 만주족들이 한족 문화에 동화돼 스스로의 정체성을 상실할까 두려워했다. 이 때문에 열하에 행궁을 만들고 정기적으로 방문, 만주족 장수와 병사를 데려와 인근 들판에서 '사냥'을 핑계로 대규모의 군사훈련을 벌였다. 만주족에 대한 정신재무장 장소이기도 했던 셈이다. 이와 함께 유목민족인 몽골 왕족이나 티베트 승려들을 불러 친목을 다졌다. 이들 비(非)한족이 장성 넘어 멀리 있는 베이징을 방문하기를 꺼리는 점을 감안, 초원지역에서 그들을 맞은 것이다. 피서산장 행궁 근처에는 몽골족이 머물 게르가 있고 주위에는 티베트 승려들이 이용할 사찰들이 세워졌다.


연암 박지원이 사신단 일행과 함께 열하를 방문한 것은 1780년으로 청 왕조가 건륭제 통치 아래 최극성기를 지나고 있을 때였다. 연암 박지원은 황제가 귀찮아도 북쪽으로 거동하는 이유가 "명목은 '피서'라고 하지만 사실은 천자가 직접 변방을 방비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틀린 말이 아니다. 지금의 우리는 청 황제들이 매년 열하와 베이징을 오간 이유가 유목민족과 농경민족을 함께 지배하기 위해서라고 알고 있다. 베이징에서는 농경민을 그들 방식으로 통치하고 열하에서는 군사훈련과 다양한 시혜를 통해 유목민을 만주족에 묶어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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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중반 내우외환으로 중국이 혼란에 빠지면서 황제들이 더 이상 열하를 찾을 여유가 없게 되고 한족에 섞인 만주족의 독자성도 희미해져 갔다. 만주족 왕조를 무너뜨리고 중화체제를 회복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졌고 결국 1911년 신해혁명으로 한족 정권이 등장하게 된다.

최수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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