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산물·석유류를 제외한 근원인플레이션 증가율이 1%대 중반으로 하락하면서 '수요위축발 저물가'가 시작됐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더욱이 경제성장률 둔화에 따른 임금정체, 고령화에 따른 소비성향 저하 등으로 앞으로 수요가 살아날 가능성도 높지 않다. 국제유가는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수요와 공급이 '원투 펀치'로 물가를 떨어뜨려 연내 0%대의 물가 상승률 진입은 불가피할 것이라는 전망에 힘이 실린다.
◇근원물가 1.6%…수요위축발 저물가 신호=통계청은 2일 지난 11월 근원인플레이션율(석유류·농산물 제외)이 전년 대비 1.6% 상승했다고 밝혔다. 이는 10월의 1.8%에서 둔화한 것으로 지난해 8월(1.5%) 이후 가장 낮다. 식료품과 에너지를 제외한 물가 상승률은 더 낮아진 1.3%로 10월의 1.6%에서 하락했다. 역시 지난해 8월(1.3%) 이후 최저치다. 전체 소비자물가 상승률도 1.0%로 9월의 1.2%에서 주저앉았다.
김성태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은 "한국은행이 현재 저물가가 공급 측 요인 때문이라고 항상 이야기해왔는데 근원물가가 떨어졌다는 것은 수요도 위축되고 있다는 뜻"이라고 평가했다. 이주열 한은 총재는 그동안 디플레이션에 대한 질문에 번번이 공급 측 요인이 지배적이라는 입장을 고수해왔다. 정성태 LG경제연구원 책임연구원은 "근원물가지수는 경제 내의 수요압력을 보여주는 대표지수"라며 "얼마 전까지만 해도 2%대에서 움직이다 1.6%로 떨어진 것은 수요압력이 그만큼 크게 줄었다는 의미"라고 진단했다.
◇전 품목 물가 상승률 둔화=한은은 현 상황을 디플레이션이라고 보지 않는 이유로 모든 품목의 물가 상승률이 둔화하지 않는 점을 꼽았다. 석유류·농산물 등 특정 품목이 주도적으로 전체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끌어내리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11월 소비자물가 동향을 보면 모든 품목에서 물가 상승률이 둔화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공업제품의 물가가 전년 대비 0.1% 하락해 지난해 5월(-0.1%) 이후 1년6개월 만에 역성장했으며 이 중 내구재는 -1.8%로 2012년 10월(-2.0%) 이후 가장 낮았다. 외식 등이 포함된 개인서비스도 전년 대비 1.8% 성장해 10월의 1.9%에서 둔화했다. 집세와 전기·수도·가스 물가지수만이 각각 2.2%, 2.1%를 기록하며 유일하게 2%대 성장률을 보여 그나마 전체 물가를 끌어올렸다.
◇질 나쁜 저물가…곧 0%대 진입=수요위축발 저물가는 '질 나쁜' 저물가라 할 수 있다. 공급 측 요인이라면 풍작 등으로 곧 물가가 상승하지만 수요위축은 현재 여건상 쉽게 변하기가 어렵다. 3·4분기 상용근로자 5인 이상 사업체의 근로자 1인당 실질임금 상승률은 전년 대비 0.08%로 2년9개월 만에 가장 낮았다. 소득이 적으니 소비가 늘어날 수 없는 셈이다. 여기에다 고령화도 수요위축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60세 이상의 평균 소비성향도 지난 분기 66.6%로 사상 최저치다. 강중구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임금은 늘지 않고 고령화로 지갑을 열지 않으면서 물가가 하락한다고 수요가 급반등할 가능성은 낮다"고 평가했다.
물가가 곧 0%대에 진입할 가능성도 높다. 정 책임연구원은 "수요가 위축되고 있는데다 최근 유가 하락이 한두 달 안에 전체 상품가격에 본격적으로 반영될 수 있어 앞으로 물가 상승률이 1% 밑으로 하락할 수 있다"고 진단했다.
이에 따라 한은에 대한 압박도 커질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전철을 밟지 말고 선제적인 통화정책을 펴 물가 하락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프레더릭 미슈킨 미 컬럼비아대 교수는 2005년 '일본 통화정책의 문제와 해결 방안'이라는 논문에서 일본이 디플레이션에 빠진 이유로 일본은행(BOJ)의 저물가 원인분석이 틀렸다는 점을 들었다. 논문에 따르면 1990년대 후반 하야미 마사루 당시 BOJ 총재는 저물가 원인으로 수요위축보다는 정보기술(IT) 혁명에 따른 업무 효율화 등 공급 측 요인이라고 밝히며 소극적 통화정책을 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