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한 재산명시심리 재판에서 전씨와 판사간에 벌어진 설전이 화제가 됐다. 재산명시심리재판은 작년에 도입된 제도로서 검찰이 재산형을 받았으면서도 이를 이행하지 않는 `악덕채무자`에게 재산내역을 법원에 제출하도록 명령하는 제도다. 그 첫 대상자가 전직대통령이라는 점도 한심한 터에 전씨가 제출한 현금재산내역이 15만원, 14만원, 1,000원이 든 예금통장 3개가 고작 이었다는 사실에 많은 사람들이 울화통을 터뜨렸다.
`나는 무일푼`에 국민 울화통
판사가 “그 돈으로 골프는 어떻게 치고 해외여행은 어떻게 다니느냐”고 추궁하자, 전씨는 “가족과 친지 등 주변의 도움으로 살아가고 있다”면서 남의 이름으로 숨겨놓은 재산은 없다고 대답했다. 그는 자신에 대한 추징금 2,205억원은 검찰이 정치자금을 뇌물로 간주했기 때문이라면서 억울하다고 했다.
그러나 전씨가 억울해 할 것은 전혀 없다. 그가 대통령 재임 중에 모금한 비자금은 9,500억원이었고, 이중 7,000억원 이상이 정치자금으로 간주돼, 추징대상에서 면제됐다. 명백하게 대가성이 입증된 뇌물에 대해서만 추징 조치한 것이다. 전씨는 1997년 5월 추징금이 확정 된 후 2000년12월까지 4차례에 걸쳐 314억원(추징율 14.3%)을 몰수ㆍ추징 당했으나 314억원의 대부분도 무기명채권 가차명예금 등 남의 이름으로 숨겨둔 돈이었다. 아들은 출판재벌이고, 10대의 손자손녀들이 수십억대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같은 시기에 같은 비자금사건으로 2,628억원을 추징 당한 노태우 전대통령은 2,073억원(추징률 78%)을 갚은 것과도 대조된다.
전씨는 재임 중은 물론 퇴임 후에도 돈의 씀씀이가 크기로 유명하다. 전씨가 무일푼이라면 완벽하게 은닉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고, 그것은 그의 씀씀이 습관이 가져다 준 결과 일지도 모른다. 그는 재직 중 추종자들에게 수십억원의 뭉칫돈을 전별금 또는 격려금조로 주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주위로부터 받고 있는 도움이 그런 사람들로부터의 도움이라면 그 돈은 추징금의 일부임에 틀림없으나 추적은 영영 불가능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전씨로서는 효과적인 미래투자 아니면 증여의제였던 셈이다.
그에게는 씀씀이 습관 외에 재산을 은닉할 충분한 시간도 있었다. 그가 대통령직을 물러난 것이 1988년 이므로 비자금사건이 불거진 1995년 까지 7년여, 금융실명제가 실시된 1993년8월까지 5년여의 시간이 있었다. 93년 은퇴한 노 전대통령의 추징율이 78%나 되는 것은 그의 씀씀이 습관과 추적의 시차 때문이 아닐까 한다.
전씨 재판 이후 `거지 왕` `구호 모금` 같은 얘기들이 비아냥인지 동정인지 구분이 안 되게 나오고 있다. 그가 전직 대통령이었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무일푼이라는 그의 말을 믿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기자도 매우 내키지는 않지만 그 중의 하나다.
전씨가 재판정에서 강조했듯이 그의 나이도 이제 72세다. 전직대통령이 악덕채무자로 법정에 서는 것은 국가적 수치다. 검찰은 이번 재판에 전씨가 제출한 재산을 추징하는 외에 싯가 6억원의 연희동 자택 별채에 대한 경매도 실시한다는 계획이다. 일단 1원이라도 추징이 이뤄지면 추징시효가 3년 연장되는 법조항을 이용해 끝까지 추징하겠다는 의지다. 끝내 추징할 것이 없으면 개인파산을 신청해서 `파산자`로 만들겠다는 다분히 감정적인 대응책을 말하기도 한다.
악덕채무자 벗는 길 찾아야
이 문제를 푸는데 연희동 자택의 별채 경매가 해법이 될 수는 없는 걸까. 연희동 집은 이순자여사 명의로 돼 있어 추징대상이 아니다. 이 별채가 남에게 넘어간다면 전씨로선 살기에 매우 불편한 집이 될 것이다. 차라리 이 집을 국가에 헌납하고 낙향을 하거나 아들 집에 들어가겠다고 선언한다면 국민들은 그를 비로소 무일푼으로 여길지도 모르겠다. 전직대통령을 집도 없는 처지로 내모는 것이 너무 야박한 면도 있지만 악덕채무자로 끝없이 법정에 세우는 것 보다는 낫다고 본다.
<논설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