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율배반인가, 어쩔 수 없는 선택인가.
손해보험사들이 숙원사업으로 여기던 무배당 연금저축보험 상품 판매가 허용된 지 6개월여가 지났음에도 상품 출시에 나서지 않고 있다.
사뭇 이중적 행보로 보이는 상황이 빚어진 이유는 금융 당국이 판매를 허용하면서 사업비를 줄이도록 규제를 가함에 따라 손보사들이 실익이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세제비적격상품(소득공제는 안 되지만 10년이 지나면 비과세 혜택이 붙는 상품)의 판매가 원천봉쇄된 차에 그간 연금저축보험의 외연을 유배당에서 무배당으로 넓히려고 애써왔던 손보사 입장에서는 김빠지는 상황이 된 셈. 하지만 금융 당국은 규제를 풀 경우 보험 계약자가 불이익을 볼 개연성이 높다며 좀 더 지켜보겠다는 입장이다.
14일 금융 당국과 업계에 따르면 소비자 선택권을 넓히는 차원에서 지난해 말 금융 당국이 무배당 연금저축보험상품의 손보사 판매가 가능하도록 조치를 취했지만 현재까지 상품 출시가 전무하다.
이 같은 결과는 금융 당국이 판매를 풀면서 사업비와 관련한 규제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보험료 운용 수익의 90%를 고객과 나누는 유배당 상품에 비해 무배당 상품은 보험사가 이익을 전부 가져간다. 그런 만큼 금융 당국은 보험료를 더 낮출 필요가 있다며 사업비를 유배당 상품의 절반 이하로 낮추도록 했다.
예컨대 사업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신계약비의 경우 기존 월납초회보험료의 최대 500% 수준에서 200% 이하로 제한했다. 이렇게 되면 설계사가 보험 가입을 성사시킨 후 수수료 명목으로 가져가는 수입이 반 토막으로 줄어든다. 설계사 입장에서는 상품이 나와도 수입이 적은 무배당 연금저축보험의 판매에 적극적으로 나설 유인이 없는 셈이다. 손보사들의 무배당 연금저축보험 상품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식게 된 데는 이런 배경이 자리한다.
한 대형 손보사 관계자는 "이런 식이라면 판매 메리트가 없다"며 "상품 출시 계획이 없으며 다른 업체도 비슷할 것"이라고 전했다. 그는 "정부가 규제를 풀면서 또 다른 규제로 족쇄를 단 셈"이라며 "고객의 상품 선택권을 높여 주려는 애초 취지를 살리려면 정부와 업계가 시장 친화적인 접점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손보사들이 설계사 수당이 적다는 이유로 상품 개발을 미루고 있지만 사업비 규제를 풀면 유배당 상품에서 무배당으로 급격히 쏠릴 가능성이 크다"고 반박했다. 유배당 상품이 저금리 시대에 맞지 않다며 무배당 상품 판매를 원하면서도 사업비만은 상대적으로 높게 책정되는 유배당 상품과 비슷하게 떼길 바라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다는 논리다.
한편 생명보험사들은 이번 규제가 세제적격상품에만 해당되는 만큼 무심한 분위기다.
생보사들의 주력은 세제비적격상품으로 전체 판매의 80%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이번 규제에 따른 여파가 미미하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