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4월5일] 시베리아 출병


1918년 4월5일, 일본군 선발대 100여명이 블라디보스토크에 들이닥쳤다. 명분은 거류민단 보호. 공산혁명의 혼란 속에서 일본 상인이 살해되자 기다렸다는 듯이 상륙작전을 펼쳤다. 1차대전과 러시아혁명의 와중에 일본과 미국ㆍ영국ㆍ프랑스ㆍ이탈리아ㆍ캐나다 군대가 적백내전에 끼어든 ‘시베리아 출병’이 시작된 순간이다. 시베리아 출병의 이유는 크게 두 가지. 러시아에 제공한 총포 등 전략물자가 독일로 유출될 가능성을 차단하고 백군을 도와줄 경우 공산혁명의 확산을 막을 수 있다는 계산에서다. 여기에 체코군단 구출까지 명분에 포함됐다. 체코군단은 오스트리아군에 징집돼 러시아군에 잡힌 체코 출신 포로를 독일과 싸울 군대로 재편성한 외인부대. 레닌이 독일과 휴전협정을 맺은 후에도 계속 싸우겠다던 체코군단의 퇴로를 보호한다며 일본은 7만3,000명의 병력을 보냈다. 모두 9만여명에 이르렀던 국제간섭군의 성과는 패배. 공산군대가 갈수록 강해졌기 때문이다. 결국 각국은 체코군단이 안전하게 철수한 1920년 군대를 빼냈으나 일본은 시베리아와 만주 일대에 대규모 병력을 주둔시키며 버텼다. 전사자가 5,000여명을 넘고 전쟁비용이 연간 재정지출에 버금가는 10억엔을 초과한 1925년에야 일본은 군대를 완전히 철수시켰다. 정작 상처는 한민족이 입었다. 조선이 쌀 수탈기지로 변한 시기가 시베리아 출병에 따른 일본의 곡가폭등과 대규모 소요사태 직후다. 여성을 일본군의 성 노리개로 삼은 위안부제도 역시 이때부터 시작됐다. 민족 이민사의 최대 비극인 연해주 조선인의 중앙아시아 강제이주(1937년)도 일본이 시베리아 출병 때 깔아놓은 스파이조직에 농락 당하던 소련의 화풀이에서 비롯됐다. 일제가 저지른 죗값을 우리 민족이 대신 치른 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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