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중반쯤이다.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계동 사옥에 출근하자마자 불호령을 내렸다. "내 집 앞에 저게 뭔가…". 청운동 자택 길목 길에 듣도 보도 못한 건설업체의 공사 가림막이 내걸린 모습을 보고는 언짢아했던 것이다. 지방의 한 중소건설사가 왕 회장 집 앞에 몇 채 되지 않은 연립주택 재건축을 맡아 홍보도 할 겸 커다란 회사 로고를 내건 게 화근이라면 화근. 명색이 건설 분야 산 증인인 왕 회장 집 앞에 남의 회사 이름이 버젓이 내걸렸으니… . 왕 회장의 심정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규모가 너무 작다며 거들떠보질 않던 현대건설이 우여곡절 끝에 시공권을 넘겨 받았다.
△청운동 재건축 해프닝은 자존심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긴 하나 기본적으로는 연고권 관행과도 얽혀 있다. 수주산업 특성상 건설업은 유달리 연고권 관행이 뿌리깊다. 문제는 연고권이 건설업계의 고질병인 담합의 단초가 된다는 점. 짜고 친다 해서 짬짜미로도 불리는 담합이 좀체 근절되지 않는 연유다. 1970년대 해외건설 황금기에 우리 업체가 해외에서 덤핑경쟁을 일삼자 중앙정보부가 교통정리에 나선 적도 있다.
△담합이 기승을 부린 때는 YS정부 시절. 드러난 사건만 놓고 보면 그렇다. 신도시 종료로 일감이 부족한 상황에서 당시 최저입찰제는 건설업계를 덤핑 입찰 아니면 담합으로 내몰았다. 단돈 1원에 낙찰되는가 하면 예정가 대비 99%에 낙찰되는 사례도 비일비재했다. 담합을 필요악이라며 눈감던 정부가 참다 못해 나섰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이듬해 삼풍백화점 붕괴참사가 결정적인 명분을 제공했다. 수백건의 입찰내역을 샅샅이 뒤진 검찰은 1군 대형건설업체 106곳 가운데 102곳이 담합에 연루됐다는 충격적인 조사결과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4대강 사업과 관련해 검찰이 대형 건설사 11곳의 전ㆍ현직 임직원 22명을 담합혐의로 기소했다. 정부가 담합을 방조한 측면이 크지만 업계는 방조가 아닌 조장이라며 볼멘소리다. 하나 엄연한 실정법 위반인 걸 어쩌랴. 행정지도에 의한 관치형 담합이라도 불법이라는 판결도 있다. 관행을 묵인하던 시절은 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