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산업일반

[차기 정부, 이것만은 고치자] <4> 기업가정신 죽이는 사회정서

맹목적 반감보다 성공한 기업 인정… 사회적 인식 바꿔야<br>"대기업 횡포" 비난 두려워 사업 접거나 해외 아웃소싱<br>기업가정신 발휘할 수 있는 정책지원·분위기 조성해야



국내 대형 조선업체인 A사는 오랜만에 들어온 수주계약을 망설이고 있다. 오랜 조선업계 불황으로 선박 가격이 지난 2008년에 비해 30%가량 떨어졌는데 이대로 계약했다가는 하청업체에 저가의 물량을 안길 수밖에 없고 이 경우 대기업이 중소업체에 횡포를 부린다는 사회적 비난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B전자업체가 최근 협력 파트너를 국내 업체에서 해외 업체로 바꾼 것도 대기업에 대한 사회의 곱지 않은 시선이 두려워서다. LCD TV 메이커인 이 업체는 제품 가격이 해가 다르게 급락하는데 이를 하청업체에 그대로 반영했다가 여론의 집중포화를 맞느니 차라리 해외에 아웃소싱하기로 한 것이다.


두 경우 모두 기업에 대한 대중적 반감이 결국 사회적 손실로 이어진 나쁜 사례에 해당된다.

기업에 대한 요즘의 사회정서는 한마디로 과거의 공은 없고 오로지 '나쁜 범법자'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C사의 한 관계자는 "우리 회사가 자랑할 것이 많다. 투자도 늘렸고 고용도 늘렸고. 그런데 이런 것들을 지금 말하면 과연 어떻게 보겠냐"며 "기업들이 얄팍한 술수를 쓰고 있다고 비난 받을 게 뻔하지 않냐"고 말했다.

정치권의 재계 때리기 등으로 확산되고 있는 반기업정서가 한국경제에 독이 되고 있다. '혁신'과 '도전'으로 요약되는 한국형 기업가정신이 수면 밑으로 가라앉고 있는 것이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요즘 같은 분위기에 대기업 총수나 최고경영자(CEO)가 나서 '좋은 말과 계획'을 발표해도 순수하게 받아들이겠냐"며 "요즘 같아서는 기업가정신이 다 뭐냐는 생각이 든다. 그저 조용히 있는 것이 상책이 아닌가 싶다"고 현재의 분위기를 전했다.

◇맹목적 반기업정서는 사회적 손실=배임혐의로 김승연 회장이 구속된 한화그룹은 최근 런던올림픽 때 사격 종목에서 금메달이 쏟아졌을 때도 김 회장이 아무도 살피지 않던 비인기 종목인 사격을 각별히 후원해왔다는 점을 드러내놓고 말할 수 없었다. 그 밖의 다양한 사회공헌활동도 한화는 사회적 비난이 두려워 입 밖에 내지 못하는 형편이다.

우리 사회의 반기업정서 확산은 정치권의 정략적 기업 때리기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고 있다. 특히 최근 정치권이 추진 중인 일부 법안은 위헌 논란까지 낳고 있다. 새누리당 경제민주화실천모임이 금융회사의 대주주가 횡령이나 배임에 연루되면 대주주 자격을 박탈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아 발의한 '경제민주화 4호 법안'의 경우 법학자들 사이에서도 위헌 소지가 있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전우현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대주주라는 이유만으로 규제를 받는 것은 사회적 보복으로 헌법의 기본권 제한원칙에도 위배된다"고 지적했다.

얼마 전 업무상 배임혐의로 법정 구속된 김승연 회장이 대표적인 케이스다. 한화 측은 그룹 전체가 부실화되는 상황을 막기 위해 부실 계열사에 자금을 투입할 수밖에 없었다고 항변했지만 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내면을 들여다보면 배임행위를 형법에서 다루는 나라는 드물다. 대부분의 국가는 배임죄로 간주되는 행위에 대해 민사상 손해배상의 책임을 묻는다. 우리나라처럼 경영진의 경영실패에 대해 민사상 손해배상 책임을 묻고 다시 업무상 배임죄로 형사처벌까지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하지만 이런 논리는 사회적 분위기에 묻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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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계의 한 관계자는 "경영자의 판단에는 항상 위험이 존재할 수밖에 없고 때로는 의사결정이 실패할 수도 있다. 판단이 틀렸다는 이유만으로 처벌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이것이 기업가정신 위축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한국 기업 특유의 도전정신 사라져=최근 주요 기업의 골목상권 침해가 이슈화됐을 당시 해당 회사는 장문의 반박자료를 준비했다. 빵집 등 자사의 골목기업이 ▦순수하게 자사 임직원 복지 차원이고 ▦해외시장 진출 차원에서 실험적으로 운영한다는 내용 등이었다. 하지만 사회적 분위기는 최소한의 해명도 허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반박 성명서를 냈다가 자사의 이미지만 더 실추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판단하에 지금도 해당 자료는 책상서랍 속에서 잠자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기업인들 스스로도 기업가정신의 위축을 걱정할 정도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지난 5월 국내 대기업 CEO와 임원ㆍ일반국민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기업가정신 인식조사' 결과 기업인의 87%는 과거보다 기업가정신이 위축됐다고 답했다.

안티 기업정서 확산에 따른 기업가정신 위축은 기업들의 투자동향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기획재정부가 6일 발표한 '설비투자 동향과 시사점' 보고서에 따르면 1990~1997년 설비투자 동향은 경기국면 대비 3분기를 앞서고 2분기를 후행했지만 최근에는 선행성ㆍ후행성 모두 1분기로 줄어들었다.

즉 1997년 이전에는 경기가 회복되기 9개월 전부터 투자를 시작하고 경기가 나빠진 뒤에도 6개월은 설비를 확충했지만 이제는 경기회복세가 완연한 시점이 돼야만 투자에 나서고 그마저도 경기가 꺾이는 것과 동시에 접어버린다는 분석이다. '불황일 때 투자하라'는 한국 기업의 도전정신이 사라지고 있다는 증거다.

황인학 한국경제연구원 기업정책연구실장은 "기업가정신은 국가 경제발전을 이끄는 중요한 동력으로 많은 해외 국가들은 기업가정신을 북돋기 위한 여러 정책적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며 "반면 우리나라는 최근 들어 성공한 기업인에 대한 평가가 야박하고 인색한 사회적 풍토가 더욱 만연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기업가정신 깨우쳐 경제활력 높여야=전문가들은 우리 경제가 지금의 위기를 뚫고 한 단계 도약하려면 기업가정신의 부활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은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기업가정신이 적극적으로 발휘될 수 있는 정책적 지원과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돼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조동근 명지대 교수는 "최근 한류열풍을 선도하는 가수 싸이의 성공은 새로움에 대한 과감한 시도와 도전정신 덕분"이라며 "경제계에서도 기업가의 자유로운 경영활동을 적극 보장해주고 성공한 기업인을 제대로 인정해줄 수 있는 사회적 풍토를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아울러 실패한 기업인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 것도 필수다. 황 실장은 "연대보증제도를 비롯해 실패한 기업인의 재기를 가로막는 각종 규제들을 개선하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며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내고 재기할 수 있는 경영환경이 조성될 때 한국형 기업가정신이 되살아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밖에 원활한 가업승계를 유도하기 위한 상속세제 개편과 기업인 명문가 인증제 도입, 인수합병(M&A) 절차 간소화도 기업가정신 활성화를 위한 조건으로 꼽힌다.

김현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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