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유로본드(유로 공동채권) 발행, ESM이나 유럽중앙은행(ECB) 등의 회원국 국채 직매입 등 다른 핵심 쟁점은 여전히 타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어 근본적인 유럽 재정위기 해결과는 거리가 멀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이번 합의 역시 미봉책으로 언제든지 유럽 위기가 증폭될 수 있다는 얘기다.
◇결국 한 발 양보한 독일=28~29일(현지시간)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유럽연합(EU) 정상회의는 당초 실질적인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 채 말 잔치로만 끝날 것처럼 보였다. 실제 회의 첫날 EU 정상들은 경기침체 등을 극복하기 위해 1,200억유로에 달하는 성장기금을 마련하기로 합의했으나 이는 시장이 요구하는 즉각적이고도 구체적인 해결책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스페인과 이탈리아가 자국 국채시장 안정을 위한 대책을 내놓지 않을 경우 어떤 안건에도 합의할 수 없다고 버티는 바람에 유로존 정상들은 당초 예정에도 없던 별도 회의를 가졌다. 유로존 정상들은 결국 13시간에 걸친 마라톤회의를 마치고 현지시간으로 오전4시30분께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요구를 수용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이날 유로존 정상회의 결과에 대해 "그동안 재정위기국의 문제해결에 자국의 부담이 너무 커지는 것을 우려해 강력하게 반대해온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의 양보를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유로존 재정해결이 중요한 발걸음을 내딛게 됐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에 당초 시장에서는 구제기금을 통한 재정위기국 은행권 직접 지원에 반대하는 독일과 이를 요구하는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입장차이가 좁혀지지 않아 EU 정상회의가 소득 없이 끝날 것으로 예상했었다. 하지만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국채시장이 갈수록 악화돼 양국이 버티기에 들어가면서 결국 독일이 한 발 물러서게 됐다.
결국 이날 유로존 정상들은 ESM을 통해 스페인 은행권을 직접 지원하기로 합의했으며 ESM에 대한 변제우선권도 없애기로 했다. 이에 따라 스페인과 이탈리아 등 재정위기국의 국채시장도 어느 정도 안정될 것으로 보인다. 실제 이날 합의 소식이 전해지면서 스페인과 이탈리아 국채금리는 각각 3주, 1주 만에 최저치를 기록하며 급락했다.
홍콩 탄리치증권의 잭슨 웡 부사장은 이날 합의에 대해 "유럽 정상들, 특히 독일이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신호를 보여준다면 상황은 괜찮아질 것"이라고 평가했다.
◇1,200억유로 규모 성장협약 마련=유로존 정상회의에 앞서 열린 EU 정상회의에서는 대규모 경기부양책이 마련됐다. 헤르만 반롬푀이 의장은 정상회의 후 "유럽 국가들의 고용증대와 성장촉진을 위해 EU가 1,200억유로의 돈을 더 쓰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번 방안은 22일 EU 정상회의에 앞서 열린 독일ㆍ프랑스ㆍ이탈리아ㆍ스페인 4개국 정상회의에서 합의된 내용이다. 당시 4개국 정상은 유럽 국가들의 성장을 위해 국내총생산(GDP)의 1%인 1,300억유로의 성장협약을 제안한 바 있다. 이날 합의한 1,200억유로는 스페인과 이탈리아 등 가장 급하게 자금이 필요한 국가들에 우선 투입될 계획이며 유럽투자은행(EIB)의 자금확충에도 100억유로 정도가 사용될 것으로 예상된다. EIB는 이를 포함한 자본확충을 통해 중소기업과 사회기반시설 투자에 600억유로를 투입할 계획이다.
다만 일각에서는 실질적으로 회원국이 마련하는 자금은 150억유로에 불과하며 나머지는 민간으로부터 확충하기로 돼 있어 실제 경기부양 효과는 크지 않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