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특파원 칼럼] '봉' 취급 당하는 한국 소비자


지난 29일(현지시간) 뉴저지주 해컨색에 위치한 블루밍데일 백화점의 몽끌레어 매장. 미국의 연말 쇼핑시즌이 시작되는 블랙프라이데이(추수감사절 다음날)를 맞아 한인들도 제법 눈에 띄었다.

몽끌레어는 이명박 전 대통령이 재래시장을 방문할 때 동반한 손녀딸이나 해외 원정도박으로 물의를 빚은 연예인 신정환이 귀국 공항에 입고 나타나는 바람에 느닷없이 유명해지면서 한국에서는 없어서 못 파는 명품 브랜드라고 한다. 이곳에서 만난 한국 기업 주재원의 아내 김모(43)씨는 "패딩 파카를 사서 부쳐달라는 친지나 친구들의 등쌀에 못 이겨 연휴에 여행도 못 가고 나왔다"며 한숨을 지은 뒤 "주변에서도 지인들의 명품 구매대행 부탁을 받는 사례를 많이 봤다"며 말했다.


이처럼 미국의 블랙프라이데이는 한국 소비자들에게 더 이상 먼 나라 얘기가 아니다. '해외 직구(직접구매)족'으로 불리는 소비자들은 온라인을 통해 의류나 잡화는 물론 TV까지 최대 절반 가격 이하로 구입하고 있다. 일년 내내 블랙프라이데이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소비자가 있을 정도라고 한다. 한국에서 일고 있는 블랙프라이데이 열풍을 보노라면 입맛이 약간 개운치 않다. 일부 소비자들의 극성이나 뒤틀린 명품 과시욕을 얘기하자는 게 아니다. 한국의 소비자들은 저렴한 가격에 나름대로 만족감을 최대화하며 합리적인 소비를 하고 있다. 문제는 '손님은 왕'이라지만 웬만큼 경제가 성장한 나라치고 한국만큼 소비자들이 천대받는 곳도 드물다는 데 있다.

한국 고객을 우습하게 아는 국내외 기업

우선 한국에서 팔리는 폴로나 DKNY·아쉬·레베카밍코프·크로커다일 등 의류나 패션, 잡화 가격이 미국 등 다른 나라보다 훨씬 더 비싼 이유를 전혀 모르겠다. 고가 정책으로 브랜드 파워를 유지하겠다는 게 업체들의 알량한 상술이라 하더라도 한국 소비자들의 피해는 무시하는 행태다. 미 의류업체인 '갭'이 블랙프라이데이 시즌에 한국 소비자의 온라인 구매를 막아놓은 대목에서는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또 샤넬·루이비통 등 이른바 명품 매장에서 흰 장갑을 낀 직원들이 고객들이 가방을 함부로 들어보지도 하게 하는 장면에서는 분통까지 터진다. 미국·유럽 등의 '여사'들은 한국의 '아줌마'들보다 손이 깨끗해 마음대로 가방을 만져보고 옆구리에 붙여보고 물건을 샀다가도 마음에 안 들면 그대로 반품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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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소비자들을 우습게 알기는 국내 기업들도 마찬가지다. 미국에서 한국산 TV는 평소에도 한국보다 30~40%가량 싸다. 또 한국 기업의 주재원들은 상당수 귀국할 때 대형 국산 승용차를 사 가지고 들어간다. 300만~400만원가량의 운송비를 들이더라도 더 이익이기 때문이다.

특히 정부마저 소비자 후생은 우습게 알고 생산자 중심의 정책에서 벗어나지 못하다고 있다. 학교급식·공공기관 구내식당에서 대기업 계열의 외식업체가 퇴출된 게 대표적인 사례다. 영세업체 보호나 경제민주화라는 취지는 이해하지만 어린 학생들의 밥상은 나빠져도 상관없다는 말인가. 시장진입 장벽을 쌓고 경쟁을 제한할 경우 서비스 질이 떨어지는 것은 필연적인 결과다. 2만명의 개인 투자자 피해를 야기한 동양그룹 사태도 기업 부도로 인한 경제 피해에만 관심을 쏟고 소비자 보호는 등한시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도 소비자 후생과는 거리가 멀다. 보수 세력은 아직도 산업화 시대의 정서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소비자보다 기업 성장을 우선시한다. 진보 세력도 농민·소상공인 등 사회적 약자의 이익 보호를 위해 소비자에게는 도덕적인 희생을 요구한다.

하지만 미국에서 애플·구글·페이스북 등 최고의 혁신 기업들이 나오는 이유는 바로 소비자 천국이기 때문이다. 소비자 눈높이에 맞춰 창조적인 제품과 수준 높은 서비스를 내놓지 못하는 기업은 도태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현 정부의 어젠다인 '혁신'이니 '창조'도 소비자를 중심에 놓고 정책을 펴보는 건 어떨까. 시장진입 장벽을 낮춰 기업들이 국내는 물론 글로벌 시장에서 소비자 선택을 받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는 구조를 만들자는 뜻이다.

소비자 천국서 최고의 혁신기업 나온다

물론 이 과정에서 독점이나 담합, 기술 빼내기 등 대기업의 불공정행위나 소비자를 우롱하는 일부 업체들의 행태에 대해서는 철퇴를 가해야 한다. 경제민주화도 정부 지원 등을 통해 중소기업이나 소상공인들이 차별적인 경쟁력을 갖추는 게 최우선이지, 대기업을 때려잡는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아직도 정체를 알듯 모를 듯한 '창조경제'구호를 보면서 드는 단상이다.


최형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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