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경제·금융일반

[스톡&스토리] 일제시대 최대 불완전판매 사건

조선조합증권사 사건을 보도한 1930년 11월15일자 신문.


1930년 11월15일 경성 황금정 7정목 8번지(현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의 한 증권사 앞에 수많은 사람이 몰려와 큰 소동이 났다. 대부분은 아이를 업은 부녀자와 노인. 조선 최대의 금융상품 불완전판매 사건이 지금으로부터 83년 전에 발생한 것이다. 그 피해 금액과 범위는 상상을 초월했고 1년이 넘는 조사와 재판으로 사회적 파장이 컸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일본인 등기의치(藤記義治ㆍ43)가 경영하는 조선조합증권사는 수백명의 외무원(투자권유인)을 고용하고 전국적으로 권업채권과 부흥채권을 할부로 판매했다. 문제는 판매약관 8조에 있었다. 8조의 내용은 '중도에 해약하면 기납한 증거금을 반환한다' '단 이와 같은 때에는 다른 사람에게 양도될 때까지 기다려라'이다.

당시의 금융상품은 중도환매가 가능한 '개방형'이었지만 8조에 따르면 실질적으로는 중도환매가 불가능한 '폐쇄형'이었다. 외무원들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판매를 하면서 '중도환매 가능'만 강조하며 약관 8조는 알려주지 않았다. 피해자는 금융상품에 눈이 어두운 부녀자나 시골 노인이었고 맹인 등 장애인도 다수가 있었다. 접수된 신고는 조선 전역에서 1,600건이 넘었다. 계약액은 무려 600만원에 달했다. 당시 600만원은 1930년 조선총독부의 연간 예산인 2억3,000만원의 2.52%에 해당하는 규모다.


1930년은 세계적인 대공황이 시작되던 때로 연말이 다가올수록 판매 부진과 계약해지 신청이 늘어났다. 부족한 자금 탓에 신규 계약자에게 실물을 인도하지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 중도환매 요청이 늘어났지만 계약의 양도자를 찾기 어려웠고 부족한 자금으로는 애당초 대응이 불가능했다. 항의하는 고객들이 몰려들자 내사를 벌이던 본정서에서는 전국적으로 피해조사에 착수했다. 또 사장과 외무원 부장 등 경영진이 구속기소돼 경성지방법원의 재판에 회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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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발생 1년 후 신문 기사에는 또 한번 충격적인 재판 결과가 보도됐다. 등기의치에게 면소라는 의외의 처분이 내려졌고 구속됐던 외무원들도 모두 석방됐다는 것이다. 손해배상의 조건으로 사건의 피해자 대표였던 유봉룡 등 24인이 고소를 취하해줬기 때문. 검사정(현 검사장)은 복심법원(현 고등법원)에 항고를 했으나 재판부는 받아들이지 않고 사건의 원활한 해결을 위해 최종 무죄판결을 내려줬다. 1930년 조선을 뜨겁게 달궜던 '조선조합취인소 사건'은 이렇게 결말이 났다.

최근 동양 사태 피해자는 대부분 일반서민이며 상당수가 70대 이상 고령자라고 한다. 83년 전의 주된 피해자가 '부녀자와 향노'라는 신문 기사와도 매우 흡사하다. 당시 등기의치는 피해자들에게 손해배상을 해주며 사태를 해결했다. 이번 동양 사태도 절충점을 찾아 피해금액을 최대한 줄이며 해결되기를 바란다. 형태는 다르지만 83년의 역사는 반복됐다. 과거를 기억해야만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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