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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6형제는 모처럼 나란히 섰다. 누가 뭐라고 할 것도 없었다.
정몽구 회장부터 몽근·몽헌·몽준·몽윤·몽일 등 고(故) 정주영 명예회장의 여섯 아들은 지난 2001년 3월21일, 아산의 죽음 앞에 다시 하나로 뭉쳤다. 대권을 차지하기 위해 꼭 한 해 전 벌였던 형제 간 갈등은 적어도 겉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왕회장'의 죽음은 현대가(家)의 변화를 알리는 신호였다.
1999년 말 자산 규모 124조원에 달했던 '공룡기업' 현대그룹은 이후 현대자동차와 현대중공업그룹·현대그룹·현대백화점·현대해상 등으로 나뉘었다. 거대기업이었던 현대가 소그룹으로 쪼개진 것이다. 재계 1위라는 수식어도 그렇게 없어졌다.
정주영 회장 탄생 100주년이면서 14주기를 맞은 2015년, 범현대그룹 계열사들은 예전의 영광을 되찾고 있다. 아산이 생전에 꿈꿨던 진정한 글로벌 기업으로 거듭난 것이다.
가장 앞서 있는 곳은 현대자동차그룹이다. '왕회장' 이후 쪼그라들었던 현대그룹을 다시 일으킨 사람이 정몽구 회장이다.
현대차의 성장은 한 편의 드라마다.
'왕회장'이 숨을 거둔 2001년 현대차의 매출액은 39조8,515억원 수준이었다. 그러나 지난해 현대차의 매출은 89조2,563억원으로 두 배 이상 증가했다. 영업이익도 같은 기간 3조1,181억원에서 7조5,499억원으로 뛰었다.
'싸구려 차'라는 조롱을 받던 현대차는 폭스바겐 같은 글로벌 기업도 신경 쓰는 글로벌 완성차 업체가 됐다. 지난해 801만대를 판매해 도요타(1,023만대)와 폭스바겐(1,014만대), 제너럴모터스(992만대), 르노닛산(847만대)에 이어 5위에 올랐다.
현대그룹의 주축이었던 현대건설도 명성을 되찾았다. 2001년 유동성 위기로 채권단 관리에 들어간 현대건설은 현대차가 인수한 뒤 지난해 해외수주 1위를 기록했다.
아산의 삼남이었던 정몽근 명예회장의 아들 정지선 회장이 맡고 있는 현대백화점도 공격경영에 나섰다. 올 들어 정지선 회장은 대대적으로 사업을 확대하고 있다. 이달 들어서만 서울 신도림 디큐브백화점과 동대문 쇼핑몰 케레스타(옛 거평프레야)를 20년 동안 빌렸다. 오는 8월에는 판교점을 새로 열고 9월에는 서울 송파의 가든파이브에 도심형 아웃렛을 추가 개점한다.
고(故) 정몽헌 회장의 부인인 현정은 회장의 현대그룹도 구조조정을 성공적으로 끝내면서 재도약의 기틀을 만들었다. 현대는 대북사업 등에서 부침이 많았다. 하지만 2013년 말 내놓은 3조3,000억원 규모의 자구안을 1년여 만에 이뤄냈다. 현 회장은 이달 18일 '왕회장'과 남편이 받았던 금탑산업훈장도 탔다. 재계 순위도 21위(공기업·농협 제외)다.
정몽헌 회장이 이끌던 현대전자(현 SK하이닉스)는 SK로 넘어가 전성기를 맞고 있다. 외환위기 당시 LG반도체를 인수할 정도로 몸집을 키웠던 현대전자는 심각한 자금난으로 채권단 관리로 넘어갔다가 결국 2012년 SK그룹에 넘겨졌다. SK하이닉스는 지난해 5조1,090억원의 영업이익을 올리며 사상 최대 실적을 거뒀다. 정유·화학경기가 최악인 상황에서 SK그룹을 살린 1등 공신이 됐다.
정몽준 전 의원이 최대주주로 있는 현대중공업은 숨 고르기를 하면서 기회를 엿보고 있다. 글로벌 경기침체로 지난해 3조2,495억원의 최대 적자를 내면서 뼈를 깎는 구조조정과 체질개선작업을 벌이는 중이다. 올해 수주액 목표도 229억5,000만달러로 잡았다.
정몽윤 회장이 있는 현대해상은 삼성화재에 이어 동부화재와 함께 2위 그룹을 형성하면서 손해보험 시장을 키우고 있다. 올해는 하이카다이렉트를 합병해 시너지를 낼 예정이다.
'왕회장'의 형제 기업들도 여전히 잘나가고 있다. 정주영 회장의 동생으로 작고한 정인영 명예회장의 아들인 정몽원 회장이 있는 한라그룹과 '포니 정'으로 불린 정세영 전 명예회장의 아들인 정몽규 회장이 이끄는 현대산업개발, 정몽진 회장이 있는 KCC 등은 재계 순위 30~40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고(故) 정순영 명예회장 계열의 성우그룹도 사세를 꾸준히 키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