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럽이 자중지란(自中之亂)에 빠져들고 있다. 유럽연합(EU) 헌법 비준 중단. 탈선의 노선을 달리는 ‘통합호’의 모습이 위태롭다. 그러잖아도 지지부진, 게 걸음을 하던 경제는 어떨까. 당장 유로화부터 연일 급락세다. 짙어지는 안개 속 EU 경제의 전조(前兆)가 심상치 않다. 』 프랑스와 네덜란드에서 EU 헌법이 부결 된지 3주. 헌법 인준 시한은 연기되고 중기 예산안 합의마저 실패했다. 갈팡질팡을 넘어 ‘판’이 깨질 우려감이 고조되고 있다. 헌법 파동의 원인이 된 ‘경제’. 정치 위기를 만들어내더니 그 불길이 다시 돌아와 타 들어가는 곳도 경제 분야다. 유로화 위상 약화, 가입국들의 경제성장 둔화 및 구조 개혁 차질 등 뒤따를 난제(難題)들이다. 세계 경제의 판에 미칠 영향도 적지 않을 전망이다. ▦위상 추락하는 유로화=올초 유로당 1.4달러 대를 넘어섰던 유로화가 급락세를 타기 시작한 건 지난달 초. 지난 한달새 거의 7~8%가 추락했다. 2002년 유로 유통 초기부터 과도하게 지속된 달러 약세ㆍ유로 강세에 대한 반작용의 이유 말고도 최근 EU 헌법 좌초 가능성이 커진 게 제일 큰 원인이다. 유로화 약세가 상당기간 지속되리라는 투자은행 들의 전망이 이어지고 있다. EU 통합에 대한 위기감은 유로에 대한 신뢰를 급격히 떨어뜨리고 있다. 이는 유로화의 세계 통화내 위상 약화를 의미한다. 따라서 각국 중앙은행들이 외환 보유고 내 유로화 비중을 확대하려는 최근의 시도도 제동이 걸릴 가능성이 크다. 대체수단으로서 금값의 변동성도 더욱 커질 전망이다. 그러나 일부에서 제기되고 있는 유럽통화동맹(EMU)의 붕괴는 그 개연성이 크지 않다. EMU 체제 붕괴는 대외거래 축소 및 금리 상승으로 인한 경제 성장 둔화 등을 초래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각국이 보유하고 있는 막대한 자산과 부채를 개별 통화로 이행하는 것은 사실상 현실성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제도 변경에 따른 막대한 기술적 비용도 만만한 게 아니다. ▦통화 약세는 긍정 요인?…역내 경제 위축 가능성이 더 커=유로 약세가 EU 경제 호전의 전기가 될 것이란 견해도 나오고 있다. 유로화 약세에 따라 수출이 늘며 지지부진한 경제에 숨통을 트게 할 것이란 뜻이다. 그러나 유럽에서의 통화 약세에 따른 수출 증대 효과는 수출로 먹고 사는 아시아의 경우처럼 절대적이지는 않다. 그보다는 오히려 정치ㆍ경제 분열로 인한 성장 저해 요인들이 훨씬 더 많다. 실제 역내 각국은 올 성장률을 속속 내려 잡고 있는 형국이다. 통합에 따른 시너지 창출에 실패하고 성장은 위축되고 물가만 오르는 스태그플레이션에 직면할 가능성에 따른 것이다. 경제가 악영향을 받을 것이란 예상에 따라 금리 인하도 제기되는 주장 중 하나다. 반면 유로화 가치가 계속 하락할 경우 신인도 회복을 위해 ECB가 조기에 금리를 인상할 가능성도 제기되는 등 금리 정책의 불확실성이 확대될 전망이다. 재정 적자 확대도 우려되는 상황이다. 각국 정부가 경제성장을 위해 세율 인하와 함께 재정 지출을 늘려 나갈 가능성이 높다. EU 집행위 및 ECB의 회원국 재정 정책에 대한 감시 기능이 약화되면서다. 또한 그에 따라 국채 발행도 늘면서 금리가 상승하는 한편 신용 등급 격차 확대로 회원국간 금리 스프레드도 커질 가능성이 있다. 이밖에도 투자환경 조성, 노동 시장 개혁 등을 중점 추진하는 내용의 지난 3월 채택된 신 리스본 전략 등 EU 차원 정책들의 추진 속도가 느려지는 등 곳곳에 경제 성장의 장애 요인들이 숨어 있다. ▦금융 시장 필두로 세계 경제에도 파장 예상=미국에 맞설 유일 세력으로서 통합 EU. 그 기대감이 일거에 퇴색하는 데 따른 파장이 간단치 않을 전망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우선 올 하반기로 예상되는 세계 경기의 상승 전환시기가 지연될 수 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드러날 현상으로는 리스크에 민감한 자본이 급속히 유럽을 이탈할 개연성. 지난 2년간 유로화 강세의 관성에 젖어있던 투자자들이 급하게 유로를 매각할 경우 가뜩이나 방향성을 잃고 흔들리고 있는 국제 금융시장은 또 한번 큰 파동을 겪을 여지가 있다. 유로 급락이 중국 위앤화에 미칠 영향을 한번 보자. 지난 2002년 이래 유럽에 대해 줄기차제 통화 절상 압력을 가했던 미국이 지난해부터 그 표적을 중국으로 돌렸다. 중국에 대한 그 동안의 위앤화 절상 압력이 유로화 약세가 심화됨에 따라 더욱 강력히 중국을 옥죌 요인으로 떠오를 수 있으며 그 불똥은 다른 아시아 국으로도 튈 수 있다. 유럽의 입장에선 유로화 약세를 역내 기업들의 수출 증가 기회로 삼으면서 특히 정보기술(IT) 분야의 글로벌 기업 대전이 더욱 격화될 가능성도 있다. 이밖에도 유럽 경제의 미시 및 거시적 많은 변화 요인들로 인해 세계 경제 여러 측면에 파장이 전달될 수 있다. 모든 자산가격 변동이 높은 상호 의존성을 갖는 글로벌 체제의 속성 때문이다. 유럽 헌법이 끝내 비준되지 않는다고 해도 유럽연합 자체가 그 즉시 붕괴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유럽연합은 통합에 관한 기존의 니스조약에 따라 움직이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완전한 정치적 통합을 통한 ‘강한 유럽’ 을 만들고자 했던 목표는 물 건너 가며 혼란은 예상외로 커질 수 있다. 최근의 EU 사태는 글로벌화하면 할수록 지역주의(regionalism)도 강해진다는 세계화의 일반 준칙에 반해 나타나고 있는 과도기적 현상으로도 해석될 여지가 있다. 보다 더 큰 트렌드로 보면 언젠가는 이뤄질 일일 듯 보인다. 그러나 어쨌든 지금 나타나고 있는 유럽헌법 비준 중단과 이로 인한 유럽통합의 지연은 세계 역사가 분명 또 한번의 새로운 분기점을 맞고 있음을 뜻한다. 경제사적 의미 역시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