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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 산책/5월 8일] 아버지는 시인이다

선고(先考)께서는 1917년 이 땅에 오셔서 1992년에 거친 인생을 마감하셨다. 아버지는 황해도 벽성군에서 태어나셨는데 그림처럼 아름다운 곳이라고 늘 회고하셨다. 생전에 '고향이 그리워도 못 가는 신세'를 읊조리곤 하셨으며 이곳에서도 고향과 비슷하게 생긴 산이나 들을 만나면 그렇게 기뻐하셨다. 그 무렵의 아버지들이 그러하였듯 아버지는 전쟁의 비극, 이산의 슬픔, 가난과의 싸움을 모두 경험하면서도 누구에게도 대들지 아니하고 자신의 부족함만 나무라는 인생을 사셨다. 하나 더 보태 대구로 피난을 내려와 정을 붙이고 자리가 잡힐 즈음 사십이 다 돼 본 첫 아들이 소아마비에 걸려 장애인으로 살아가는 모습까지 지켜보셨다. 자식 아픔 당신 탓으로 돌려 입학을 거부하는 학교의 선생님들을 찾아가 사정하던 모습도 보기에 딱했다. 불편한 자식의 등교를 돕겠다고 자전거 뒷좌석에 장애 아들을 태우고 가다 적발되면 경찰에게도 그저 고개를 숙였다. 매사에 고개만 숙이는 아버지가 부끄러웠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다음에 내 아들에게 자랑스러운 아버지가 되리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자식을 키워보고서야 부모님의 마음을 이해한다고 했다. 아들의 열감기에도 잠 못 이루던 경험을 하면서 부모님을 다시 이해하게 되고 새삼 부모의 인생이 사무치게 가련해서 먹먹해지곤 했다. '내가 학생 때는 그러지 않았다'는 말을 쉽게 내뱉는 내 모습을 보며 바보같이 살았던 아버지가 오히려 내 성장의 자양분이 아니었을까 돌아보게 됐다. 요즘 젊은이들의 고통을 지켜보면서 가난하고 배우지 못했던 부모님, 그러면서도 사랑과 희생정신, 그리고 겸손이 몸에 배어 있었던 부모들을 두고 있었던 우리 세대가 오히려 축복 받은 세대가 아니었던가 생각해본다. 부모 세대의 큰 희생으로 우리는 더 배우고, 더 빨리 시대의 주역이 됐던 반면 오늘의 우리는 다음 세대의 몫까지 욕심을 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아버지는 늘 과로 상태였고 누구에게나 고개를 숙이셨으니 스트레스도 크게 받으셨으리라. 그러면서도 유독 시작(詩作)에 집착하셔 시 쓰기에 몰두하셨다. 말년에는 눈까지 불편해지면서도 시에 대한 애착을 놓지 않고 돋보기로 시 한 구절 한 구절 읽기를 멈추지 않으셨다. 그리고 맞지 않는 철자법으로라도 시를 만들어 투고하는 것을 큰 낙으로 삼으셨다. 훗날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모두가 시인이었다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선고의 모습이 떠올랐다. 인디언들은 '내 아들에 관계해서 내가 아프다'며 자기 자식이 아픈 것을 내가 아프다고 표현한다고 한다. 사냥한 짐승을 먹으면서도 미안해하면서 짐승의 영혼이 내게 들어온다고 생각했던 인디언들. 자연과 세계에 늘 미안해하고 겸손했다는 그들을 우리는 시인이라고 부른다. 시에 인생 喜怒哀樂 담으신듯 이창동 감독의 최근작인 '시(詩)'는 시를 쓰려 마음을 먹을수록 고통을 겪게 되는 여인을 그리고 있다고 한다. 무엇이 아버지가 그토록 시작에 집착하게 했는지, 나로서도 남은 인생에 큰 숙제이다. 나는 선고를 칠곡군 지천면 야산에 모시고 비석 대신 작은 시비를 세웠다. '밤이에요. 고요히 흐릅니다. 음악과 나의 시가 다정히 손잡고 어데로 어데로 가자고 속삭입니다. 슈벨트와 하이네가 다정하게도 같이 가고 있네요. 나도 가렵니다. 마구 달립니다. 숨 막혀요. 엄마 아빠의 얼굴 고향언덕 산과 들 아기진달래 휙휙 지나갑니다.( 선고작 '음악과 시'의 한 대목)' 먼저 사과하고 먼저 용서를 구하다 보면 자식이 더 자유로워질 것이라고 믿으셨던 분, 시를 읽고 시를 쓰려고 애쓰셨던 분. 아버지, 편안하세요. 안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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