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중계기를 생산하는 벤처기업 C사는 지난 여름 대치동 사옥을 매각하고 성남으로 공장을 옮기고 말았다. 일감이 줄어들어 직원들 월급 주기도 쉽지 않은데다 자금난까지 겹쳐 회사규모를 축소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례는 현재 통신장비업계가 처해있는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통신시장의 굵직굵직한 신규사업이 장기간 표류상태에서 헤매면서 한국 IT(정보기술)산업의 뿌리를 자처해온 통신장비업체들이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지금이라도 정책당국이 적절한 투자환경을 조성하고 새로운 미래 청사진을 제시하지 못하면 `정보통신 강국`의 위상을 경쟁국에 물려줘야 할 것으로 우려된다.
◇표류하는 4대 신규사업=각 사업별로 수조원대 생산유발 효과가 있다며 수년 전부터 각광을 받아온 사업들이 일제히 갈피를 못 잡고 흔들리고 있다.
최대 사업인 WCDMA 사업의 경우 서비스업체가 투자를 대폭 줄임에 따라 가입자 확보, 망구축 등의 작업이 지연돼 서비스가 사실상 내년 이후로 늦춰졌다.
위성DMB 사업은 내년 4월 총선 이전까지 개정법 통과가 극히 불투명해 사업자 선정조차 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이런 상황에서 정보통신부와 방송위원회의 부처간 갈등으로 정부 내 의견조율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어 업계의 불안감을 증폭시키고 있다.
표준 선정을 둘러싸고 업체간 의견이 갈려 사업 자체가 불투명한 휴대인터넷과 홈네트워크사업도 표류하기는 마찬가지. 휴대인터넷의 사업의 경우 통신업체마다 표준 채택을 요구하고 있는데다 정책당국이 사업자 확대 의사를 밝혀 관련업계의 반발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홈네트워크사업도 최대 사업자인 KT가 정보통신부와 다른 플랫폼을 채택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데다 정작 이동통신사들은 사업성이 불투명하다며 선뜻 뛰어들기를 꺼리고 있다.
◇3중고에 시달리는 장비업계= 통신업체들의 올해 설비투자가 2000년의 70% 정도로 축소되면서 통신장비업계는 고사직전으로 몰리고 있다. 장비업계는 사업물량 감소에다 신규 사업마저 표류하면서 저가입찰에 따른 수익성 악화, 자금난에 따른 신규투자 위축이라는 3중고에 직면해 있다.
통신장비 및 단말기 생산업체들은 4대 신규사업이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줄 것으로 기대해왔지만 시장상황이 꼬이면서 잿빛 절망감에 빠져들고 있다.
WCDMA는 통신사업자별로 1조원대의 설비투자에다 고가의 단말기로 매년 1조원 이상의 생산유발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를 모아왔지만 현실은 이와 정반대 양상을 보이고 있다. 특히 50여개에 달하는 중계기 생산업체들은 최근 1~2년간 개점휴업 상태에서 WCDMA와 위성DMB 사업의 조기개시만을 손꼽아 기다려왔다.
통신단말기 업체들도 다양한 형태의 4대 신규사업을 통해 고부가 신규단말기 특수를 누릴 것으로 기대해왔지만 사실상 꿈을 접어야 할 지경이다. 시장상황이 어려워지면서 그나마 있는 시장을 잡기 위해 업체간 제살 깎아 먹기 식 저가경쟁이 기승을 부리고 있어 자칫 연쇄 도산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당근이 필요하다=이 같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현재로서는 업계 차원의 해결책을 찾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통신사업자들로서는 가뜩이나 내수경기가 위축된 데다 시장전망이 불투명해 공격적 투자가 쉽지 않다. 정부가 추진중인 신성장동력산업도 아직은 걸음마 단계여서 당장 먹거리가 없는 장비업계로서는 `그림의 떡`이라는 분위기다.
이 때문에 업계는 정부가 기간통신사업자들의 적극적인 투자를 이끌어낼 당근을 제시해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특히 WCDMA 출연금 중 일부를 사업자들의 재투자에 활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각 업체별로 1조원이 넘는 출연금 중 일부라도 투자재원으로 활용하는 조건으로 출연금 규모를 줄여줄 경우 장비 업계에 숨통이 트일 수 있을 것이란 주장이다. 이는 또 WCDMA 투자에 소극적인 이동통신업계가 적극적으로 방향을 선회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란 게 업계의 주장이다.
통신업체 한 관계자는“통신시장 환경이 과거의 예측과 크게 달라진 상황에서 원칙론만 고집해서는 안된다”며“정통부의 역할은 재원 확보가 아니라 통신산업 육성인 만큼 근본적인 정책방향 전환이 필요한 때”라고 말했다.
<정두환기자,김호정기자 gadgety@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