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가 왕안석의 인생은 드라마 자체였다. 역사상 그만큼 영욕을 경험한 이도 드물다.
송나라 황제 신종(神宗)은 국가재정확충 등 일련의 개혁을 위해 왕안석을 발탁했다. 그는 젊은 인재들을 대거 등용해 구법당(舊法黨) 인물들을 조정에서 몰아낸 뒤 농민, 중소상인들을 대상으로 한 저금리 금융정책 등 대대적인 개혁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왕안석이 권력을 잡자 주변에는 많은 사람이 몰렸다. 개혁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찬 신진관료들도 있었지만 권력 부스러기라도 얻으려는 부나비들도 많았다. 이런 사람들은 왕안석을 정점으로 신법당(新法黨)을 결성했다. 일부 신법당 인물들은 왕안석을 `공자에 버금가는 성인`이라며 아첨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개혁조치가 당초 취지와는 달리 화폐경제강요, 세금부담증대 등으로 영세상인 과 농민들을 몰락시켜 나가자 왕안석도 추락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주위에는 적(敵)들만이 즐비했다. 동생 왕안국조차 신종에게 "모두들 왕안석이 사람을 제대로 볼 줄 모르고 가혹한 세정(稅政)을 펼친다고 원성이 자자하다"고 고할 정도였다.
왕안석의 말년은 아주 참담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은 화병을 얻어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 왕안석이 직접 관을 구해 아들의 장례를 치렀다.
1993년 문민정부가 들어선 뒤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개혁을 외쳤다. 국민들은 김영삼ㆍ김대중정부의 개혁성과에 대해서는 그리 후한 점수를 주지 않는다. 개혁이 성공했다면 우리네 삶도 과거보다 훨씬 나아져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결코 그렇지 못하다.
노무현정부도 개혁을 부르짖고 있다. 출범 6개월을 갓 지낸 노무현정부에 대한 평가는 아직 이를 수 있다. 하지만 벌써부터 걱정하는 목소리가 많다. 반대세력을 얼싸안고 설득하기보다는 코드가 맞고 철학이 같은 사람들만 찾다 보니 반발은 더욱 커지고 있다. 그래서 노무현정부가 자꾸 고립돼가고 있다고 말하는 이들도 많다. 대통령 스스로 `무당적`을 선언해 효율적으로 국정을 운영할 수 있을 지 갸우뚱하는 시각도 적지 않다.
진정으로 개혁을 원한다면 반대편의 의견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5년 안에 자신이 원하는 집을 완성하겠다는 욕심도 자제하는게 좋을 듯하다. 개혁은 하루아침에 이뤄질 수 없고 권력은 무상할 수도 있다는 것을 역사는 입증해왔다. 힘은 배척하는데서 오는게 아니라 보둠어 안음으로써 커진다.
<정문재<경제부 차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