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기고] '죽음의 계곡'을 정복하라

미국 미시간주의 앤아버(Ann Arbor)에는 무색 콜라 등 소비자들이 외면한 실패상품 7만여점을 전시하는 ‘실패박물관’이 있다. 설립자인 로버트 맥메스는 과거의 실패 사례를 새로운 상품에 반영하지 않아 계속해서 실패작이 나오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실패박물관의 교훈은 ‘소는 잃었지만 다음 소를 위해 외양간을 고치자’는 것이다. 이런 발상이 부품ㆍ소재에 적용된 것이 ‘신뢰성’이라는 개념이다. 신뢰성은 지난 50년대부터 특정 부품의 고장이 바로 대형 참사로 직결되는 우주ㆍ항공 분야에서 부각되기 시작했다. 최초의 제트 여객기인 ‘코메트(COMET)’의 동체 수명 예측 오류, 80년대 일본항공의 보잉747기 컨트롤러 기능 상실은 대형 참사로 이어졌다. 이런 대형 사고를 일으킨 고장의 원인을 분석하고 내구성을 파악하는 -이미 소는 잃었지만 외양간을 고치는- 과정에서 ‘초기 제품의 성능이 어느 정도의 기간 동안 고장 없이 유지되는가’라는 신뢰성 개념이 나왔다. 고장 분석에서 시작된 사후적인 신뢰성은 90년대 말 전세계적으로 확산된 벤처기업 지원정책의 추진 과정에서 개념상 변화를 맞는다. 즉 기술개발 이후 사업화 단계에서 자금 부족으로 벤처기업 대부분이 도산하는 ‘죽음의 계곡(Death Valley)’ 극복 과정에서 신뢰성의 중요성이 부각됐다. 죽음의 계곡은 기술 개발과 사업화에 성공했더라도 부품의 신뢰성 부족으로 수요기업이 적극적인 구매를 기피하면서 도산하게 되는 현상을 말한다. 사후적 신뢰성에 주력하던 과거와 달리 수요기업에 납품을 하기 위해서는 고장을 사전에 방지해 완제품 성능을 보장하는 예방적 신뢰성이 요구된 것이다. 오늘날처럼 경쟁이 격화되는 환경에서는 한번이라도 소를 잃게 되면 더 이상 외양간을 고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소 잃기 전에 외양간을 고치자’는 것이다. 60년대부터 미국ㆍ일본 등 주요 선진국은 고장물리(physics of failure)를 근간으로 신뢰성 지원조직을 구성해왔다. 이 조직들은 설계 단계에서부터 신뢰성 확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연구 성과물은 국제 규격으로 채택돼 세계 일류상품 개발에 초석이 되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 부품ㆍ소재 신뢰성 수준은 아직 선진국에 비해 미흡하다. 실제 미국시장에서 TV의 수리율(repair rate)을 조사한 결과 일본산(3.0)에 비해 한국산(8.5)의 신뢰성이 취약한 것으로 나타났다. 대다수 업체들이 신뢰성 향상을 품질관리운동(QC)으로 오해하는 등 업계의 인식도 낮은 실정이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도 신뢰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01년 제정된 ‘부품ㆍ소재특별법’에 관련 규정을 마련하는 등 정부를 중심으로 다양한 지원을 추진하고 있다. 그리고 업계ㆍ학계 및 연구기관 전문가의 의견을 폭 넓게 수렴하고 자체적인 연구를 지속한 결과 선진국으로부터 신뢰성 기술 수준을 인정받아 CE마크 등 해외 유명 인증마크와 상호인정협정까지 체결하는 성과를 거뒀다. 이로 인해 부품ㆍ소재의 수출이 크게 증대되고 국산 자동차의 신뢰성 수준이 세계 20위권에 진입하는 등 그동안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가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신뢰성에 대한 업계 인식은 크게 부족한 실정이다. 대부분의 기업들은 신뢰성 향상을 제조적인 측면의 품질관리 활동으로 오해하고 있다. 잘못된 인식은 바로잡고 각 주체별로 전략도 달리 세워야 한다. 대기업은 신뢰성을 높이기 위한 자체 연구 개발은 물론 협력업체와 공동으로 대응하는 것이 좋다. 반면 기본 인프라가 취약한 중소기업은 신뢰성 향상 지원사업 등과 같은 정부의 지원제도를 활용해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 민간기업 주도로 신뢰성 향상을 추진하는 선진국과 달리 우리나라는 정부 주도로 추진해왔다. 정부의 신뢰성 인증 시한이 오는 2009년인 만큼 남은 기간 동안 좀더 집중적인 투자가 이뤄져야 한다. 그래서 더욱 튼실한 신뢰성 기반을 마련할 수 있다면 우리 부품ㆍ소재 기업들에 죽음의 계곡은 ‘황금의 계곡(Golden Valley)’으로 바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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