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세 번째 아이가 세상에 나왔습니다. 주변에서 많은 축하를 받느라 즐겁기도 했지만, 밤에는 편한 잠을 못 이루고 아침에는 산후조리 중인 집사람을 대신해 다른 두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느라 나름대로 과중한 육아분담(?)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무수히 많은 사건 중에서 판사가 제일 힘들어 하는 것 중 하나는 아마 가족간의 분쟁일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 형과 동생 사이,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 사위와 장인 사이의 재판은 재판을 수행하는 당사자도 힘이 들겠지만, 이를 판단하는 판사도 힘이 듭니다. 그래서 새로운 사건을 배당 받아 최초 기록검토를 할 때, 원고의 이름과 비슷한 이름의 피고가 있는 기록 표지를 보면, 가족이 아니길 바라면서 기록검토를 시작하곤 합니다. 그런데 이런 가족간의 분쟁은 최근의 일만은 아닌가 봅니다. 지금부터 약 2,000년 전에 기록된 신약성서에는 어떤 사람이 형제 사이의 분쟁에 관해 예수에게 묻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에 대한 예수의 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그렇지만, 판사는 가족간의 분쟁에 대해 예수처럼 교훈적인 말씀만을 해 줄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구체적으로 누구의 말이 맞는지 따져봐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증거를 살핀 후 당사자들에게 구체적으로 물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법정에서 가족들 간에 언성이 높아지는 일도 더러 있습니다. 가끔은 형에 대한 아우의 존칭은 없어지고 막말이 오고 가기도 합니다. “네가 형이면 다냐? 형이면 형답게 처신을 해야 할 거 아니야?” 심지어는 장인에 대해 험한 말이 나오기도 합니다. “아니, 장인이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는데 큰소리를 치나요?” 이런 가족간의 분쟁이 일어나는 법정에서는 가끔 판사도 도망쳐 나오고 싶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가족들 사이에서 분쟁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모나거나 괴팍한 사람들인 것처럼 보입니다. 흔히 가족간에 재판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 안 좋은 편견을 갖기 십상이지만, 막상 재판을 진행하다 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한 번은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에 땅 소유권에 관한 분쟁이 있었습니다. 시아버지는 자기의 다른 아들들에게 땅의 일부라도 나눠줄 생각이었고, 남편이 죽은 며느리는 별다른 재산이 없어 자기 딸들을 키우는 데 땅을 이용해 보겠다는 생각으로 재판에 임하고 있었습니다. 나름대로 사연이 있고, 입장이 있었습니다. 여느 다른 사건과 마찬가지로 가족 사이의 사건도 결론을 내야 합니다. 판결을 작성해 선고를 하게 되면 결국 가족 중 일방의 주장은 받아들이고, 다른 쪽의 주장은 배척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가족끼리의 분쟁이 화해로 끝나면 판사는 마음이 참 편안해 집니다. 한 번은 남매끼리 분쟁이 있었는데, 3차례 서로 의견을 조율하는 과정을 거쳐, 서로 양보하는 것으로 화해가 됐습니다. 과정 중간에는 고성이 오가며 싸우기도 했지만, 막상 그렇게 화해가 되고 나니 마음이 좋았습니다. 셋째 아이가 태어나, 집안에 아이가 셋이 되다 보니, 아이들이 모두 엄마의 사랑을 받기 위해 시끄럽습니다. 형제간은 어릴 때부터 그렇게 경쟁적인가 봅니다.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않다는 예수의 교훈처럼, 우리 아이들도 서로 양보하면서 살도록 가르치고, 가능하면 재판 받는 장소에는 오지 않도록 키우고 싶습니다. ▦ 이글은 본지 홈페이지(hankooki.com)뿐 아니라 서울중앙지방법원 홈페이지(seoul.scourt.go.kr)를 통해서도 언제든지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