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중국·유럽 등 주요국들이 경기부양의 실탄이 떨어지자 기업들의 보유현금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재정적자가 쌓이고 초저금리가 장기간 유지되면서 재정·통화정책이 한계에 봉착한 상황에서 기업들의 현금을 동원해 투자확대와 임금상승을 유도하고 세수도 확충하겠다는 의도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9일(현지시간) "선진국·신흥국을 막론하고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공공부채가 급증한 반면 경기회복세는 지지부진하자 기업들이 깔고 앉은 현금에 주목하고 있다"고 전했다. 최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신년 국정연설에서 이른바 '중산층 경제'의 재원마련을 위해 본국에 세금을 내지 않으려 해외에 이익을 쌓아둔 다국적 기업을 겨냥한 것이 대표적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기업의 역외수익에 19%의 세율을 적용하고 현재 2조1,000억달러 규모인 국외 유보금에는 14%의 세율로 일회성 세금을 매기기로 했다. 마크 카니 영국중앙은행(BOE) 총재도 최근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이 늘어난 기업들의 현금을 수익성 높은 투자로 유도하는 데 실패했다"면서 "민간 부문의 현금을 재순환시킬 수 있는 재정정책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중국 역시 다국적 기업의 조세회피 관행에 전쟁을 선포했다. 이날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에 따르면 지난주 중국 정부는 주요20개국(G20) 등 주요국과의 협력강화를 통해 이른바 '세원잠식 및 소득 이전(BEPS)' 방식으로 세금을 빼돌리는 외국 기업들을 엄중 단속하겠다고 밝혔다. 우리나라도 지난해 기업의 배당과 투자 확대를 유도하기 위해 기업 사내 유보금에 세금을 매기는 기업소득환율세제를 도입했다.
이처럼 각국이 기업들의 보유현금에 군침을 흘리는 것은 금융위기의 후유증으로 정부는 빚더미에 앉았고 가계의 소비여력이 줄어든 반면 기업들은 중앙은행이 공급한 '싼 자금'의 혜택을 누리면서도 투자확대 등 제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불만 때문이다. 실제 컨설팅 업체인 딜로이트에 따르면 지난해 3·4분기 전 세계 비금융 대기업의 보유현금은 3조5,000억달러로 지난 2005년의 1조8,000억달러보다 2배 가까이 늘었다.
나아가 주요국들은 내수부양을 위해 기업들에 임금인상 압력도 높이고 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연이은 공세에 지난달 말 재계를 대표하는 게이단렌이 "디플레이션 탈출에 기여하기 위해 올해 임금인상 폭을 지난해보다 높이겠다"고 밝힌 게 단적인 사례다. 또 이날 텔래그래프에 따르면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도 10일 영국상공회의소 지도부와 만나 임금인상을 주문할 방침이다.
하지만 정부가 기업 현금을 동원해 경기부양을 나서는 데 대한 회의적인 시각도 크다. 클레멘스 퓌스트 독일 만하임대 교수는 "단기 수요창출에는 효과가 있겠지만 장기투자를 유도하는 데는 현명한 수단이 아닐 수 있다"며 "가령 향후 규제에 대한 불확실성을 줄이는 것이 기업 지출을 늘리는 열쇠"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