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창간 49주년을 맞은 서울경제신문의 역사는 한국경제의 애환과 함께한 격동의 세월이었다. 초년의 서울경제신문은 한강의 기적을 예비했고 2009년 반세기의 역사를 앞둔 현재 세계 경제무대에서 한국이 지난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를 재연할 수 있도록 혼신의 힘을 기울이고 있다. 1960년 8월1일, 국내 최초의 경제신문인 서울경제신문의 창간은 전쟁의 폐허를 딛고 경제 번영을 일군 '한강의 기적'을 예고하는 장엄한 서곡이었다. 당장 먹고 사는 게 문제였던 시절, 대다수 국민은 아직 경제가 뭔지 관심조차 가질 여유가 없었다. 이때 경제와 번영이라는 화두를 국민에게 던져 우리도 잘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갖도록 의욕과 용기를 심어준 서울경제신문의 출현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서울경제신문 창간은 1960년이지만 태동은 그보다 훨씬 전인 194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창간 발행인인 고 장기영 사주는 1950년대 전쟁이 휩쓸고 간 폐허에서 나라 경제를 다시 일으킬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뜻 있는 국내 유수의 인사들과 함께 '서울경제연구회'를 창립했다. 그 깊은 뜻이 고스란히 신문의 제호로 옮겨져 우리나라 최초의 경제신문 이름이 서울경제신문으로 결정됐다. 경제 재건의 염원은 지면에서 그대로 살아났다. 1960~1970년대 '수출입국' '경제계획' '개발과 성장' 등을 다룬 서울경제신문의 기사와 제목들이 거의 매일 지면을 가득 메웠고 당시 독자들은 '하면 된다'는 자신감으로 충만해졌다. 경제 저널리즘의 개척자인 서울경제신문의 유년기와 청년기는 개혁의 연속이었다. 우선 1969년 주24면에서 주36면으로, 1974년 주36면에서 주48면으로 각각 늘린 서울경제신문은 이어 1975년 증권기사를 대폭 확대했으며 부동산 정보란을 신설하는 혁신을 단행했다. 1980년 8월1일에는 전인미답의 10만 고정독자 돌파의 위업을 달성했다. 그러나 1980년 신군부의 등장으로 서울경제신문과 독자들은 뜻하지 않은 비극을 겪었다. 군사정권은 권력의 위세에 굴하지 않고 정론만 고집한 서울경제신문에 재갈을 물리기 위해 1980년 11월25일을 기해 강제폐간이라는 폭거를 저질렀다. 하지만 서울경제신문은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섰다. 1988년 8월1일 정론의 기치를 들고 복간한 서울경제신문은 '국민 경제의 양심적인 파수꾼이 되겠습니다'라는 다짐과 함께 독자 앞에 돌아왔다. 1990년 경제지 중 최초로 월요일자를 발행해 국내 최초의 전통을 이어간 서울경제신문은 1994년 5월1일 신문제작 체제를 완전 자동화했고 1999년 6월12일 경제지로서는 아무도 오르지 못한 지령 1만호 발행의 고지에 섰다. 뉴 밀레니엄과 함께 창간 40돌을 맞은 2000년 서울경제신문은 새 천년 첫 날 '통일경제신문'을 표방하며 화합과 번영의 새 시대를 열어나가는 기수가 되겠다고 약속했다. 서울경제신문은 사회 전반을 뒤흔든 특종과 시의적절한 기획기사로 국민경제의 어젠다를 선점해왔을 뿐 아니라 다양한 행사와 시상으로 경제발전의 주축이 됐다. '존경받는 기업ㆍ기업인 대상'과 한국건축문화대상은 이미 재계와 건설업계에서 최고의 상으로 인정 받고 있다. '이달의 과학기술자상'은 한국 최고의 과학자로 발돋움하는 등용문이 됐고 2000년 1월부터 서울경제신문이 주최한 증시대동제는 연초 여의도의 상징이 됐다. 2007년 출범한 '힐스테이트 서경오픈'도 최고 권위의 한국 여자 골프대회로 자리매김했다. 출판국에서 내놓는 국내 최대 발행부수, 최고의 열독률을 자랑하는 서울경제 골프매거진과 140년 전통을 가진 세계 최고의 과학시사 정보지 파퓰러사이언스는 서울경제신문의 또 다른 자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