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경제·금융일반

[외환위기를 겪은 사람들] 이용득 당시 금융산업노조 위원장

"관치금융이 환란 부른 결정적 요인" <br>IMF 과도한 요구, 정치권서 되레 악용<br>결과적으로 美투기자본 이익 용인<br>협상에 충격 주려 금감위 점거·총파업


[외환위기를 겪은 사람들] 이용득 당시 금융산업노조 위원장 "관치금융이 환란 부른 결정적 요인" IMF 과도한 요구, 정치권서 되레 악용결과적으로 美투기자본 이익 용인협상에 충격 주려 금감위 점거·총파업 대담=이용웅 경제부장 yyong@sed.co.kr 정리=이재철기자 humming@sed.co.kr 사진=김동호기자 관련기사 • 김용환 "DJ '換亂극복' 선언 왜 서둘렀는지…" • 김중수 "잠재성장률 저하 가볍게 봐선 안돼" • 최종욱 "제역할 못한 정부·은행·기업 '합작품'" • 유종근 "DJ불신에 美와 외채협상 제일 힘들어" • 이연수 "정부 '하이닉스 무조건 팔아라' 독려" • 정덕구 "대선 휘말려 신종 경제위기 올까 걱정" • 위성복 "기업 사정 모른채 구조조정 밀어붙여" • 손병두 "대우그룹 몰락, 정부도 일부 책임있다" • 김대송 "증권사 무분별 해외진출 리스크 크다" • 이용득 "관치금융이 환란 부른 결정적 요인" • 강봉균 "대우, 구조조정 서둘렀으면 해체 안돼" “IMF의 요구가 과도했는데도 정부와 정치권은 비판은커녕 다른 목적을 위해 이를 이용했고, 결과적으로 미국 투기자본의 이익을 상당 부분 용인하게 됐다. 충격적인 요법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정부와 IMF가 협상을 벌이던 금융감독위원회를 기습 점거했다. 금융권 총파업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눈물의 비디오’가 상징하듯 외환위기 이후 금융권에는 구조조정의 회오리가 몰아쳤고, 구조조정 대상이 된 금융권 노동자들의 반발도 거셌다. 지난 2000년 7월 금융권 사상 초유의 총파업을 주도했던 이용득(54ㆍ한국노총 위원장ㆍ사진) 당시 전국금융산업노조 위원장은 금융권 구조조정 작업에서 은행간 합병의 타당성이나 효율성이 철저히 무시됐다고 비판했다. 그는 두 시간여 동안 인터뷰를 하면서 금융권 노동자들이 총파업을 벌이고 길거리로 나설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를 구수한 입담으로 풀어냈다. 그는 IMF를 비판하면서도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정부와 정치권, 그리고 변화를 거부한 은행 모두에 의해 금융산업의 투명성이 확보되지 못했다”며 “관치금융의 폐해가 결국 환란을 자초한 결정적 내부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내부에서 위기의 원인을 찾는 데도 주저하지 않았다. -외환위기 발생원인을 금융노조의 입장에서 어떻게 보나. ▦YS정부의 실정 차원을 떠나 금융기관을 시스템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많았음에도 이를 게을리했다. 정치적 이유에서였다. 정부는 관치(官治)를 계속하고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금융 시스템 변화를 원하지 않았으며 기업 역시 ‘변화’를 거부했다. 이런 문제들이 복합적으로 얽혀 외환위기를 맞은 것이다. -철저한 금융감독 시스템 부재가 외환위기의 직접 원인이 됐다는 지적이 있다. 이를 역으로 보면 금융기관의 무원칙 경영이 부실을 자초한 것 아닌가. ▦원칙과 투명성을 누가 모르나. 알면서 안 했던 이유는 ‘사적 거래’가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정부도 금융기관을 ‘사금고’로 여겼다. 가령 정부가 대기업에 추가 대출을 해주라고 하면 대출금의 일부는 정치자금으로 흘러들어가게 돼 있었다. 무능한 은행원만 있는 건 아니다. 용기 있는 사람들이 문제를 제기했지만 다 묵살됐다. 정치권의 이해관계 때문에 금융산업의 투명성이 확보되지 못했다. -IMF 처방에 대한 정부의 대응은 적절했는지. ▦98년 12월 금융노동조합연맹 위원장으로 당선된 후 제일 답답했던 건 자료가 아무것도 없었다는 점이다. 유일한 게 신문이었다. 하지만 당시 신문의 기조가 IMF를 비판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위기를 맞았기 때문이다. 또 하나 정치적 이유가 있었다. YS정부의 실정이 부각되면서 DJ정부는 이를 치유하는 성과를 남겨야 했다. 물론 내부적으로 DJ정부가 상당한 고민을 했을 수도 있지만 이런 정치적 이유 때문에 IMF를 비난하기는커녕 그들의 요구를 오히려 극대화한 부분이 있었다고 본다. -구조조정을 둘러싸고 IMF에 금융노조가 강력 저항했는데. ▦IMF가 한국 금융산업에 충격요법을 요구한 상황은 일정 부분 인정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선의로만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IMF가 국제 투기자본의 요구를 쉽게 거절하지 못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IMF는 미국의 이익을 대변했다. 이 때문에 IMF에 충격적으로 저항해야겠다고 판단했다. 상징적 저항을 위해 우선 99년 국내 법원에 IMF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퇴출은행 근로자 5명, 부도 중소기업 근로자 6명이 원고). 두번째 협상장소를 급습해 (IMF에) 피부로 느끼게 해주자는 생각으로 99년 7월15일 금융감독위원회를 기습 점거했다. 이는 정부의 협상력을 재고시키는 효과도 있다고 판단했다. (당시 이 위원장 등은 1층에서 방문증을 받아 15층으로 들어갔다. 금감원이 은행 노조원들에게 점거되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는 순간이었다. 이들은 IMF 대표들에게 “무턱대고 은행 자산건전성 분류기준을 강화할 경우 대손충당금 부담이 너무 커져 BIS 비율이 하락하고 막대한 손실이 불가피하다”는 등의 입장을 피력하고 해산했다.) -국내 금융권 역사상 첫 총파업도 있었다. ▦2000년 6월6일 현충일에 DJ가 식사에서 단 한 줄 “금융권 구조조정은 더욱 강도 높게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것을 빌미로 삼아 7월11일 총파업을 벌였다. 어떻게 보면 선전ㆍ선동으로 조합원들을 총파업으로 몰고 간 것일 수도 있다. 우리가 강하게 나가자 당시 정부도, IMF도, 국민도 당황했다. 이를 계기로 정부와 노조가 공개적으로 협상한 최초의 사례가 만들어졌다. 이헌재 금융감독위원장과의 공개협상이 그것이다. 당시 ‘7ㆍ11 합의서’라는 게 나왔는데. ▦이는 노조와 정부가 공개적으로 합의서를 작성했다는 점에서 노동사에 기록될 일이다. △관치금융, 강제 구조조정 불가 △러시아 차관 30억달러 반환 요구 등을 넣었다. 특히 IMF가 무리한 요구를 하더라도 정부가 항변하고 저항할 수 있도록 하는 근거들을 많이 넣었다. 예금자 보호 등이 그런 것이다. IMF가 요구한 예금자 보호 금액이 2,000만원이었다. 당시 미국이 10만달러를 보장해주던 데 비해 턱없이 적은 금액이었다. 그래서 “한국 국민들은 2,000만원밖에 보호받을 자격이 없느냐. 1억원은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1억원을 가지고 정부와 IMF가 실랑이를 하다 5,000만원으로 합의했다. -총파업 이후 은행간 합병작업이 더욱 빨라졌다. ▦2000년 12월 국민ㆍ주택은행 합병 전 2000년 4월 김정태 당시 주택은행장이 신한은행을 찾아가 먼저 합병을 제안했다. 하지만 신한은행 책임자를 만나지도 못했다. 당시 금융권의 정서는 ‘주택은행은 정책금융이나 하는 기관’이었다. 반대로 IMF 입장에서는 도매금융(기업금융)을 취급하지 않았으니 참 좋은 은행이라고 여겼던 것 같다. 당시 청와대에서도 주택은행과의 합병 압력이 들어왔지만 신한은행은 끝까지 버텼다. 신한은행은 재일교포가 대주주라서 관치에서도 좀 자유로웠던 것 같다. (2000년 중반 김 행장은 신한은행과의 합병을 위해 이희건 당시 신한은행 회장을 만나기 위해 일본까지 건너가기도 했다. 신한은행은 ‘지주회사제’를 표방하며 합병 요구를 뿌리쳤다.) -국민ㆍ주택은행간 결합에 대한 평가는. ▦신한은행과 합병도 안 되고 시간만 흐르자 (정부가) 국민ㆍ주택끼리라도 합병하라고 해서 그렇게 됐다. 합병 전 김 행장은 언론 인터뷰 등에서 “국민은행과의 합병은 시너지가 없다”며 거절하지 않았나. (당시 김 행장은 "같은 소매금융을 추구하는 은행끼리의 합병은 바람직하지않다"고 강조했다. 국민은행도 2000년 상반기 작성한 금융권 구조조정안에서 “주택은행과 국민은행은 업무나 점포가 80%가량 중첩돼 있어 시너지 효과가 없을 뿐 아니라 합병 후 두 은행 직원 가운데 9,000명가량을 정리해야 해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두 은행장은 2000년 12월22일 오후 한국은행에서 두 은행간 합병 사실을 전격 발표한다.) -국민ㆍ주택은행 합병을 계기로 2차 총파업이 촉발됐다. ▦김 행장을 만나 “시너지 효과도 없는데 왜 합병을 하느냐”며 “7ㆍ11 노정합의서 내용에 담긴 강제합병 불가 약속을 대외적으로 밝혀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김 행장은 강제합병이 아니라며 버텼다. 나중에 김 행장은 국민은행을 상대로 어린애 팔 비틀듯했다. (당시 김상훈 국민은행장은 금융감독원 부원장 출신으로 2000년 3월 국민은행 행장 취임 당시 노조가 “은행 대형화를 추진하기 위한 낙하산 인사”라며 거세게 반발했다.) 이 때문에 12월28일 2차 총파업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파업은 당일 철회됐고 파업을 주도한 우리는 1년 동안 감옥에 가야 했다. -외환위기 이후 금융권 노사관계에 어떤 변화가 나타났는지. ▦IMF 전에는 관치금융에 대해 노조의 저항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환란 시기 금융권에 산별노조가 만들어졌다. 노정 입장에서 이제는 확실한 파트너십이 생겼다. 정부도 중요한 문제에 대해 금융노조의 의견을 상당히 많이 듣고 논의하고 있다. -구조조정으로 국내 금융산업 시스템의 선진화가 이뤄졌다고 보는가. ▦지금 우리은행의 대주주는 정부이다. 옛날 같으면 우리은행장을 정부 관료로 보면 된다. 하지만 지금 황영기 행장이 정부 지시대로 움직인다면 주식시장에서 우리은행 주가가 형편없어진다. 우리은행의 재무상태을 탄탄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황 행장이 시장에서 인정을 받는 것 아닌가. 이런 것들이 금융산업에 나타난 큰 변화이다. 외환위기 시절 은행장들과 대화를 많이 했는데 대다수 은행장들은 우리 의견에 동의해줬다. 그렇지만 몇몇 관료 출신 은행장들은 철저히 정부 입장에 섰다. 이런 세력이 하루 빨리 없어져야 한다. -우리은행의 정부 지분 매각이 임박했는데. ▦인수주체 등을 놓고 너무 논리적으로 얽매일 필요는 없다. 산업자본도 금융자본을 투자할 수 있다. 대신 소유와 경영을 철저히 분리하는 내부 시스템만 잘 만들면 된다고 본다. -민주노총의 새 지도부가 출범했는데 민노총과의 관계설정을 어떻게 할 것인가. ▦대화가 안 되는 사람들과는 대화하지 않는다는 원칙도 상대에 따라 하는 것이다. 이석행 신임 위원장하고는 개인적으로 형제 이상의 절친한 선후배 사이다. 하지만 노동운동은 대중운동이다. 대중의 변화와 눈높이를 의식하지 않은 자기들만의 운동은 결국 죽게 돼 있다. 그 결과가 세계 최저의 조직률 아닌가. 지금은 노동의 최대 위기다. 그럼에도 87년 직후의 운동기조를 계속 가져간다면 어떻게 되겠나.. -신임 지도부와의 회동 계획은. ▦개인적으로는 이 신임 위원장을 수시로 만날 수 있는데 이 위원장 조직을 둘러싼 한노총 내부의 목소리도 있다. 위원장을 폭행하고 한노총을 해체하겠다는 말까지 했는데 여기에 대해 공식적인 사과가 있어야 한다. 나도 조직의 대표다. -노사정위원회가 최근 수년간 표류하고 있는 것 같다. ▦표류만 하지는 않았다. 지난해 노사관계 선진화 로드맵, 비정규직 보호법안, 노사발전재단, 산재 관련법 등 굵직한 4개 법안을 통과시켰다. 노와 사는 노사정위를 인정하는데 일부 정치권에서는 그걸 모른다. 노사정위와 별개로 노사 중심의 만남의 장이 있어야 하는데 이게 바로 노사발전재단이다. 노사발전재단이 더 큰 방향으로 갈 건지 또 하나의 만남의 장을 만드는 것으로 축소될지 여부는 정부가 어떤 자세를 가지느냐에 달렸다. 한노총과 재계와는 신뢰관계가 형성됐다. ◇약력 ▦53년 경북 안동 ▦덕수상고, 성균관대 경영학과 ▦74년 상업은행 입사 ▦86년 상업은행 노조위원장 ▦89년 전국금융산업노조 상임 부위원장 ▦99년 전국금융산업노조 위원장 ▦04년~현재 노사정위원회 노동자 대표, 한국노총 위원장 입력시간 : 2007/02/12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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