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초로 휴대폰이 울리면 향기가 나는 초소형 발향장치를 개발, 유럽시장에서 잇달아 대규모 수출계약을 따내고 있는 국내 한 벤처기업의 A사장은 지금 큰 시름에 빠져 있다. 유럽연합(EU)의 초강력 환경규제 제도인 ‘신화학물질관리제도(REACH)’가 최근 발효되면서 내년 11월 말까지 관련 발향물질의 정보를 모두 보고해야 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기술유출 가능성. 국내에는 제대로 된 전문시험기관(GLP)이 없는 상황이어서 결국 A사는 관련 외국 경쟁업체가 즐비한 일본의 한 공인 물질 분석기관을 이용해야 할 판이다. 이 경우 자칫 지난 수년 간 막대한 연구개발비를 투입, 특허까지 취득한 핵심 기술이 고스란히 경쟁업체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지난 1일 REACH가 본격 발효되면서 대EU 수출 주력기업들 사이에서 기술노출 우려에 대한 걱정이 커지고 있다. 세계적으로 공인된 GLP가 전무한 상황에서 세계 경쟁상품에 기술적 우위를 확보하고 있는 국내 상품이 해외 분석기관을 통해 등록절차를 밟을 경우 국내 핵심기술이 드러난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정부는 아직까지 GLP 설립에 대한 밑그림조차 완성하지 못해 기업들의 불안감을 더욱 증폭시키고 있다. ◇REACH 발효, 국내 기업에는 ‘이중고’=REACH는 한마디로 유럽으로 반입되는 모든 상품을 구성하고 있는 화학물질 정보에 대한 방대한 ‘’. 관련 정보를 등록하는 의무는 모두 해당 제품 제조ㆍ수입업체들의 몫이다. REACH는 앞으로 1년 간 유예기간을 두고 내년 6∼11월 사전등록이 실시된다. 이에 따라 국내 모든 EU 수출기업들은 자사 상품에 함유된 화학물질이 연간 1톤 이상일 경우 관련 물질정보 분석을 GLP에 의뢰, 그 결과를 EU 화학물질청에 사전등록해야 한다. 6개월의 사전등록 기간을 놓친 기업들은 앞으로 유럽시장 수출이 원천 봉쇄될 만큼 EU는 REACH 발효로 유해한 화학물질에 대한 엄격한 통제를 실시할 방침이다. 뿐만 아니라 사전등록 절차 이후 오는 2009년부터 2018년까지 11년 간 순차적으로 실시되는 본등록 절차를 밟는 동안 국내 기업들은 화학물질 시험분석비ㆍ등록비 등 끊임없는 원가 상승 부담에 시달릴 것으로 우려된다. 업계에 따르면 국내 대표적 화학업체인 L사의 경우 현재 사전등록 물질이 32개이고 본등록 물질도 21개에 이를 것으로 자체 추산돼 등록비와 대리인 수수료가 수백억원대에 육박할 것으로 예상된다. 게다가 현재 국내에 유해성 물질을 분석할 수 있는 공인 GLP마저 없어 물질 분석을 모두 해외 GLP에 의뢰해야 할 판국이다. 본등록 과정에서 실시되는 GLP의 유해성 테스트(64개 항목)를 위해서는 해당 기업이 제품 물질 정보를 제공해야 해 심각한 기술노출이 우려되는 상황이다. 산업자원부의 한 관계자는 “사전등록이 이뤄지면 물질별로 컨소시엄이 구성돼 해당 업체들이 공동으로 자료생산과 등록절차를 밟게 된다”며 “이 과정에서 기밀유출 가능성이 있어 일부 기업들은 컨소시엄이 아닌 별도의 대리인과 계약을 맺고 개별 등록을 해야 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중소기업 타격 가장 클 듯=EU의 REACH 시행은 자본력이 미약한 중소기업에 직격탄이 될 전망이다. 정부는 통계를 근거로 일단 국내 REACH 등록 부담이 주로 전기전자ㆍ자동차ㆍ화학 업종을 중심으로 한 대기업 위주로 발생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지난해 492억달러에 달하는 대EU 수출 총액을 업종별로 보면 ▦ 200억달러 ▦ 100억달러 ▦ 74억달러 ▦ 16억달러 등 수출규모가 큰 일부 산업에 집중돼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역규모가 가장 큰 전기전자 업종의 경우 대기업의 브랜드로 수출되는 제품의 상당수가 중소기업의 손을 거쳐 제조되는 현실을 고려할 때 자본력이 미약한 중소기업의 부담도 결코 만만치 않을 전망이다. 정부가 집계한 REACH 대응 관련 기업 부담은 최소 5,000억원(산자부)에서 최대 2조5,000억원(환경부) 수준으로 이중 중소기업 부담 비중을 20%로 잡더라도 최대 5,000억원의 원가 상승 요인이 초래되는 셈이다. 이에 대해 산자부의 한 관계자는 “자본과 정보력에 밝은 대기업들은 이미 지난해부터 체계적인 대응에 착수한 반면 중소기업들은 뾰족한 답을 찾지 못한 채 정부 지원만을 기다리고 있는 실정”이라며 “REACH 규정상 모든 의무는 결국 기업이 부담해야 하는 만큼 대응준비가 안 된 중소기업 위주로 수출 금지라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발생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독자적 분석기관 3년째 검토만=국가적 차원의 독자적 GLP 설립이 시급한 상황에서 정부는 지난 2004년부터 본격적인 범부처 대응전략을 짜고 있지만 아직까지 설립 타당성 조사조차 마치지 못한 실정이다. REACH 수요를 충족할 국내 시험시설과 전문가가 부족, 독자적 설립에 따른 사업 타당성이 검증돼 있지 않다는 게 정부의 설명이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환경부가 그나마 적극적으로 GLP 설립을 요구하고 있지만 과연 국내 GLP가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는 기관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시각이 강하다”고 말했다. 정부는 현재 국책연구기관을 통해 GLP 기관 육성에 필요한 비용과 자체 육성의 투자 타당성 등에 대한 연구용역을 진행 중이며 이르면 8월께 최종 결과가 나올 예정이다. 전문가들은 그러나 REACH가 이미 발효된 만큼 조속히 독자적인 GLP 설립을 추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국내의 한 컨설팅 업체 관계자는 “EU뿐만 아니라 미국의 경우 강력한 환경ㆍ노동 규제를 표방하고 있는 민주당이 REACH와 유사한 수준으로 자국 내 화학물질 관리수준을 크게 강화할 가능성이 커 독자적 GLP 설립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GLP 설립에 의욕을 보이고 있는 금동화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원장은 “우리나라에 독자적인 GLP가 없다면 국내 기업은 상품 관련 정보를 일본에 의뢰할 수밖에 없어 기밀정보 유출과 비용 부담이 동시에 가중될 것”이라며 “내년 사전등록까지 1년밖에 시간이 남지 않은 상황이라 정부의 결단이 최대한 빨리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