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반도체 도둑질(허두영 기자의 해외과학가 산책)

정장을 차려입은 한 무리의 신사들이 아무 스스럼없이 대기업이 입주한 건물의 정문 현관으로 걸어 들어온다. 수위는 방문객들의 옷차림으로 보고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 온 것 같아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는다.전산실에 도착한 이들은 갑자기 총을 꺼내 들고 전산요원들에게 엎드리라고 고함을 지른 다음 컴퓨터를 약탈하기 시작한다. 이들은 숙련된 솜씨로 불과 몇분 사이에 메모리칩을 포함, 약 1천달러 상당의 컴퓨터 부품을 털어 달아난다. 이 장면은 제임스 본드가 등장하는 007 영화도 아니고 TV의 형사 반장도 아니다. 최근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어바인시에서 실제로 발생한 사건이다. 미국 전역에서 들끓고 있는 전형적인 반도체 도둑질의 한 사례일 뿐이다. 기술절도방지 재단에 따르면 캘리포니아의 실리콘 밸리만 하더라도 매주 1백만달러 상당의 컴퓨터 부품들이 도난당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보면 이같은 기술절도로 인한 피해액은 전자제품의 손해는 물론 보험료까지 포함해 연간 80억달러에 달하고 오는 2000년께 2천억달러에 이를 전망이다. 한 번 도둑맞은 반도체는 추적하기 어렵다. 장물로 넘어간 반도체는 밀수품 처럼 몰래 거래되고 외관상 정품과 아무런 차이가 없을 뿐아니라 조립되어 컴퓨터 속으로 숨어버리기 때문이다. 소매상도 메모리칩과 중앙연산처리장치는 아무데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기 때문에 환영한다. 반도체 도둑질은 좋은 장사가 되는 것이다. 반도체 도둑질의 피해는 잃어버린 주인에게 국한되지 않는다. 훔친 반도체는 사실상 중고품이기 때문에 규격보다 기억용량이 적고 성능도 떨어진다. 따라서 소비자들은 성능이 떨어지는 반도체 때문에 컴퓨터를 제대로 활용할수 없게 된다. 반도체 제조기업은 소비자들로부터 불량품을 유통시켰다는 항의에 곤욕을 치르는 것은 물론 전자제품 제조기업도 유지보수 요구가 잦아지고 반품이 늘어나 골치를 썩이게 될 것이다. 반도체 도둑질은 원래 영화에서 적군이나 경쟁기업의 기밀을 빼내는 방법으로 등장한 것이다. 반도체 도둑들은 처음에 이같은 영웅심리에서 장난으로 도둑질을 시작하다가 세계적인 메모리칩 부족 현상에 힘입어 전업(?)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이제 컴퓨터를 잘 다루는 사람들은 공들여 작성한 데이터가 들어있는 반도체를 도둑맞지 않기 위해 보안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고 컴퓨터를 장식품으로 장만한 사람들은 같은 무게의 황금보다 비싼 반도체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컴퓨터를 창고에 꼭꼭 숨겨놓아야 할 지경이 됐다.<워싱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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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두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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