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 5∼6명에 10억씩 줬다”/돈 전달된 구체내역까지 진술/설연휴 이후엔 윤곽 드러날듯정태수씨 구속 이후 주춤하던 한보 수사가 급진전을 보이고 있다. 3일부터 정씨가 그 무겁던 입을 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정씨가 진술한 정치권 및 금융계 인사들에 대한 로비 진상은 가히 핵폭탄급이다.
정씨는 수십명의 정치인들에게 떡값 명목으로 3천만∼5천만원씩 주었으며 특히 5∼6명에게는 정치자금으로 10억원씩을 건넸다고 진술했다. 또 모 지방단체장에게 95년 6·27 지방선거때 선거자금으로 10억원을 줬다고 털어놨다. 돈이 전달된 구체적인 내역까지 함께 진술했다.
검찰은 이를 매우 고무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검찰은 이제 이들 사이에 오간 돈의 성격, 즉 범죄성 여부를 가리는데 눈길을 돌리고 있다.
검찰은 정씨의 진술에 이어 4일 소환한 전·현직 은행장들에 대한 조사를 통해 정치권 비호세력을 캐내는데 수사력을 모을 방침이다.
검찰은 은행장의 사법처리를 이번 수사의 목표 지점으로 보지 않고 있다. 오히려 정치권 수사의 전초전 쯤으로 여기는 분위기다. 핵심은 은행장 이상의 정부 고위층이나 정치권 인사의 개입 여부를 밝히는 것이다.
한 수사 관계자는 『한보 사건이 미치는 정치·경제적 파문을 감안해 은행장 수사를 마치는 즉시 정·관계 인사에 대해 수사할 계획』이라고 밝혀 설 연휴 이후에는 정치권에 대한 수사 윤곽이 드러날 것임을 시사했다.
그러나 정치권에 대한 검찰 수사가 쉬운 것만은 아니다.
우선 정씨로부터 돈을 받은 정치인들의 상당수가 떡값이나 후원금 조로 받아 정치자금법상 처벌근거가 미약하다는 점이다. 게다가 정치인들 가운데 여야 중진급도 다수 포함돼 있어 이들을 사법처리할 경우 정치권의 대파란이 예상된다는 점도 검찰을 고민스럽게 하는 대목이다.
또 정씨로부터 돈을 받고 한보철강에 특혜대출을 해주도록 외압을 가한 뚜렷한 증거, 즉 「대가성」과 「직무 관련성」이 드러나지 않는 한 처벌이 어렵다는 것도 문제다.
한편 법조 주변에서는 한보 사건이 정치권에 엄청난 파문을 일으킴에 따라 여권이 당정개편 시기를 앞당기는 촉진제가 될 지도 모른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또 이번 사건을 계기로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을 수 있도록 정치자금법을 손질해야 한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현행 정치자금법은 여야가 94년 3월 정치자금법을 바꾸면서 「정치자금을 기부하고자 하는 자는 기명으로 선거관리위원회에 직접 기탁해야 한다」는 조문앞에 「정당에」라는 단어를 삽입함으로써 정치인 개개인의 정치자금 수수에 대해서는 뇌물·알선수재·공갈·협박 등 다른 범죄에 해당되지 않는 한 처벌을 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성종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