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 찬바람속 송년모임 알뜰해진다
여느 해 같으면 망년회다, 사은회다 해서 저녁 일정이 빽빽하게 잡혀있을 연말. 그러나 올해는 경기침체의 여파로 분위기가 썰렁하기만 하다. 기업들의 경우 아예 일체의 공식 송년모임을 생략하거나 취소하는 곳도 많다.
그냥 넘어가기 아쉬워 모임을 계획하는 이들도 큰 돈 들이지 않고도 지인들과 마음껏 이야기할 수 있는 알뜰 송년모임을 계획하고 있다.
대전 S고교의 재경동창회는 작년엔 1차 고기집, 2차 노래방, 3차 심야주점으로 거나하게 망년회를 했었지만 올해는 주말을 이용해 간단히 점심을 함께하기로 했다.
분위기에 휩쓸리다 보면 저녁 모임은 아무래도 1차로 끝내기 힘들어지기 때문.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이다 보니 예년에는 3차가 기본이었다. 그러나 저녁에 만나다 보면 모두 술에 만취해 할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그저 '놀자판'으로 모임이 끝나 회원들도 점심 송년회를 반기고 있다.
이 모임의 박취용(48)회장은 "지난 모임에서 한 회원이 점심송년회를 처음 제안했을 땐 술을 한잔하고 기분껏 놀아야 한다는 반론도 많았지만 비용도 적게 들고 회원들간에 그 동안 있었던 일들을 마음껏 이야기할 수 있어 점심송년회를 흔쾌히 결정했다"고 말했다.
연말이면 남편의 가까운 친구끼리 모임을 갖는 한일희(35)씨의 경우 올해는 각자가 부담없는 요리 한가지씩을 준비해와 한 집에서 만나는 서양의 포트럭(potluck) 파티 를 흉내낸 '보따리 뷔페'모임을 계획하고 있다.
한씨는 매년 모이는 친구 가족들끼리 늘상 패밀리레스토랑을 이용하곤 했지만 로열티를 한푼이라도 아끼자는 차원에서 이용을 자제키로 했다. 2차로 가던 노래방 순서 대신으론 가족별 장기자랑 대회를 열 생각이다.
이밖에 회사 구내식당에서 송년회를 갖거나 연극ㆍ콘서트를 관람하며 분위기를 즐기는 모임도 늘고 있다. 또 복지시설을 방문, 봉사의 하루를 보내는 것으로 대체하는 사람들도 적지않다.
이와 함께 IMF때에 버금가는 취업난으로 분위기가 우울한 대학 4학년생들은 사은회 규모를 대폭 줄이거나 아예 취소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특히 취업이 상대적으로 더 어려운 지방대나 인문ㆍ사회계열 학과들은 사은회에 대한 논의조차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L대 교육학과의 경우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학생들이 회비를 걷어 사은회를 치렀으나 올해는 강의실을 빌리고 몇가지 먹거리만 장만해 교수님들을 모시고 그 동안의 고마운 인사를 대신한다는 계획이다.
이 학과 과대표인 허은지(23)씨는 "교수님들이 제자들의 딱한 사정을 고려해 아예 사은회를 하지 말자고 제안했으나 그렇게 할 수는 없어 약식으로 사은회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지방대의 사정은 더 심해 대전의 C대 경영학과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취업을 위해 상경, 내년2월 졸업식에 맞춰 간단히 사은회를 갖기로 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교수들도 "취업이 어려운 학생들을 앞에 놓고 편안히 대접 받기가 부담스럽다"면서 "사은회는 나중으로 미루고 취업 등에 더 신경을 쓰라"며 고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석영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