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3월23일] 하이에크


[오늘의 경제소사/3월23일] 하이에크 권홍우 편집위원 케인스와 하이에크. 20세기 경제학을 대표하는 두 사람이다. 누가 더 많은 영향을 끼쳤을까. 이름의 중량감은 케인스가 앞서지만 시점을 1970년대 이후로 자른다면 하이에크가 커 보인다.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Friedrich Hayek). 오스트리아 출신의 영국 경제학자이자 사회철학자다. 1899년 빈에서 태어나 경기순환연구소장으로 일하며 미국의 경기불황을 예고한 하이에크는 1931년 런던으로 둥지를 옮겼다. 케임브리지대학의 케인스에 대항할 학자를 찾던 런던 정경대학의 초빙을 받은 그는 16년 연상인 케인스와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대공황의 원인을 과소투자ㆍ소비로 보고 정부의 개입을 강조한 케인스와 달리 그는 과잉투자ㆍ소비를 문제로 들며 계획경제를 배격했다. 논쟁은 케인스의 승리로 끝나고 대부분의 정부가 케인스를 교과서로 삼자 그는 우울증에 빠졌다. 아내와 이혼한 뒤 얻은 첫사랑과의 재혼에서도 극복하지 못한 중년의 우울증은 1974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을 계기로 사라졌다. 노벨상 수상 이후 행로는 승승장구. 케인스 경제학이 효력을 상실했다는 비판과 함께 하이에크가 레이건과 대처에 의한 평가를 받으며 해법으로 떠올랐다. 모든 것을 시장에 맡기라던 그는 화폐 발행까지 민간에 넘기라는 주장도 내놓았다. 1992년 3월23일 사망하기 전에 사회주의의 몰락과 독일 통일을 봤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거 봐, 내가 뭐랬어.’ 똑같은 독일어권 출신으로 영국에서 연구한 마르크스와 그를 비교한 대목이 흥미롭다. 공교롭게도 마르크스는 오른쪽 귀, 하이에크는 왼쪽 귀가 먹었기에 각기 우파와 좌파의 목소리를 못 들었다나. 번역서로 소개된 ‘자본주의의 매혹’에 나오는 제리 멀러 교수의 하이에크에 대한 평가-‘수정처럼 영롱한 눈을 지닌 외눈박이.’ 입력시간 : 2007/03/22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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