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5월9일] 1873년 대공황

주가폭락으로 모든 게 주저앉았다. 만국박람회의 흥청거림도, 다뉴브강에 흐르던 왈츠의 선율도 깨졌다. 기업이 도산하고 투자자들은 쪽박을 찼다. 1873년 5월9일 빈에서 발생한 일이다. 빈발 공황은 독일과 영국ㆍ미국으로 확산돼 1890년 중반까지 이어졌다. 원인은 공급과잉. 후발산업국 독일과 미국이 쏟아내는 생산품이 넘친 반면 수요는 보불전쟁에서 패한 프랑스 경제의 위축 등으로 줄어든 상황이 공황으로 번졌다. 공황은 세계사의 흐름을 갈랐다. 무엇보다 자유방임주의 시대의 종말을 앞당겼다. 고삐 풀린 자본주의에 대한 반성은 1883년 독일의 연금제도 도입과 2차 대전 이후 등장한 복지국가로 나타났다. 자본주의는 주기적으로 공황을 겪을 수밖에 없다는 엥겔스의 ‘만성적 공황론’과 공산주의 이론도 공황이라는 배양기 속에서 급속도로 퍼졌다. 세계가 공유한 최초의 공황은 최초의 세계대전을 낳았다. 위기대책으로 너나 없이 값싼 원료와 신규 노동력 확보에 나섰기 때문이다. 수에즈 운하의 권리를 사들이고 아프리카 남단까지 식민지를 확대한 영국이나 식민지 쟁탈전에 뒤늦게 끼어든 독일의 외교정책에는 ‘공황 타개책’이라는 공통분모가 나온다. 미국에서는 거대기업이 생겨났다. 벤더빌트와 카네기ㆍ록펠러에 의한 철도ㆍ철강ㆍ석유산업 독점이 유럽발 악재로 인한 주가 급락과 금융긴축이 겹친 불황 속에서 진행됐다. 문제는 133년 상황이 재연될 수 있다는 점. 세계의 과잉생산을 흡수하던 중국이 과잉공급 요인으로 변한 지 오래다. 다국적 독과점기업에 의한 폐해도 날로 늘어난다. 자유방임의 대안으로 등장했던 복지국가가 퇴색한 자리에는 신자유주의가 대신 들어섰다. 대공황이 던진 숙제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역사의 반복이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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