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회담 당시 일본에 제시했던 103만여명의징용.징병 피해자 수는 주먹구구식으로 산출된 숫자였습니다" 1960년 10월부터 2년간 국제법을 전공하던 서울대 교수로서 한일회담에 참가하고 이듬해 외무차관으로 전격 발탁됐던 정일영(鄭一永.79) 전 차관은 20일 연합뉴스기자를 만나 이 같이 말했다.
정 전 차관은 "당시 우리가 만든 수치는 거의 소설로 재판소에 가도 증거능력이없는 것"이라며 "관련자료는 일본측이 다 갖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군사정권 당시 한일회담과 관련한 각료회의인 `한일회담 관계국무회의'에서 각 부처별로부터 피해자 현황을 제출하라고 해 받아보니 내무부는 면사무소에 물어봐 몇 명이라고 하는 등 기가 차더라"며 "피해자가 몇 명인지 우리 저금이 얼마인지 통계가 없었다. 한국은행에 가본 들 자료가 없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정 전 차관은 1961년 11월12일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과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총리와의 단독회담 때 통역을 맡았던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한일회담이 난항을 겪고 있던 당시 박 의장은 통역이 필요없는데도 `내가일본말을 할 줄 알지만 그렇게 하면 안되지 않느냐'며 나를 데리고 들어갔고 내가 통역을 하는 동안 많은 생각을 하며 말을 하는 등 시간을 벌었다"고 말했다.
2시간 동안 진행된 회담에서 박 전 대통령은 "우리는 구걸하려는 것이 아니라받을 것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한일 국교정상화를 우리 국민이 원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많은 식자들은 일본의 자본이 들어오는 것을 `경제적 침략'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런 것을 잘 알아야 한다"는 등 `침략'이라는 `과격한' 용어까지 사용하며 시종일관 당당하게 임했다고 정 전 차관은 전했다.
식민지 시절 피해자들에 대한 피해보상이 제대로 안됐다는 지적에 대해 그는 "관련법을 국회에서 만들어 신청을 받아 사망자에게 2년간 지급했지만 그것이 충분했느냐 여부에 대해 이론이 많은 것 같다"며 "하지만 생존자에게 보상하기 위해서는증거가 있어야 하는데 쉬운 일은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당시 법안을 보면 청구권 자금 사용처에 대해 자세히 나와있다. 어디에도개인을 위해 써야 한다고 되어 있지 않다"며 "3억달러를 받아 103만명에게 나눠 주라고 했더니 딴 데 썼다는 식의 논란은 말이 안된다. 피해자 산출에 대한 증거가 없는데 무슨 수로 돈을 받아내겠느냐. 그래서 포괄적으로 돈을 받았고, 한국인 전체가피해자라고 해서 청구권 자금을 경제발전에 썼던 것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재협정을 맺어야 한다는 일각의 주장에 대해 그는 가능성이 없다고 단언했다.
한일협정상 개인청구권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고 규정되어 있는데다, 1969년 5월22일 발효된 `조약법에 관한 빈 조약' 39조 `조약의 개정에 관한일반규칙'에 따르면 조약은 당사국간 합의에 의해 개정할 수 있도록 되어 있지만 현실적으로 일본이 이에 응할 가능성은 거의 제로라는 것이다.
일본은 식민지하 `한국재산'을 패전 이후 한국땅과 영해에 있는 모든 재산을 미군정에 넘겼고,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서면서 그 재산이 한국으로 넘어왔으며, 이는1951년 9월의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 의해 다시 한 번 확인함으로써 배상 문제는끝이 났다는 입장을 한일회담에서 되풀이 했다고 그는 전했다.
정 전 차관은 "일본측은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으로 조선땅에 있던 모든 재산을 다 넘겨주지 않았느냐. 받아갔으면 됐지 뭘 자꾸 받아가려 하느냐'며 회담내내소극적으로 나왔다"며 "우리측도 증거도 찾기 힘들고 사무적으로 해결하기에는 언제끝이날지 몰라 정치적으로 타결코자 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일회담의 정치적 타결의 상징인 `김종필-오히라 메모'의 `무상 3억, 유상 2억, 상업차관 1억'에 대해 "당시 `구론산'을 수십병이나 마셔가며 협의를 했다.
아마 그 정도 선은 미국에서 나온 게 아닌가 생각한다"며 "당시 미국은 동북아 정세등을 감안해 한일관계 개선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서울=연합뉴스) 이상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