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경제·금융일반

[秘錄, 김우중신화의 몰락] <2막 4장> 관료, 그 악연의 사슬

DJ신뢰 과신… "면전서 관료 타박 일쑤"


[秘錄, 김우중신화의 몰락] 관료, 그 악연의 사슬 DJ신뢰 과신… "면전서 관료 타박 일쑤" 김영기 기자 young@sed.co.kr 관련기사 • 秘錄, 김우중신화의 몰락 [전체보기] ㆍ"산업정책은 없고 금융정책만 있다…" ㆍ"통상마찰 해결못하면 자리 그만둬라" ㆍ갈등수위 높아질수록 대우 자금난 가중 ㆍ"무역금융 풀어달라" 끈질긴 요청에 ㆍ"외상수출로 장난치려…" 관료들 반격 ㆍ99년7월 DJ마저 등돌려 '고립무원' 외환위기의 불길이 거세게 타오르던 97년 12월20일. 3전4기 끝에 왕좌에 오른 다음날, 김대중(DJ) 대통령 당선자가 김영삼(YS) 대통령과 마주했다. 오랜만의 만남, 오찬은 2시간을 훌쩍 넘겼다. 이 자리에서 두 사람은 12명으로 된 비상경제대책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했다. 김용환 자민련 부총재, 유종근 전북지사, 김원길ㆍ장재식 국민회의 의원, 허남훈ㆍ이태섭 자민련 의원. 새로운 파워 집단이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해를 넘긴 1월30일 다보스의 센트럴호텔. 한 무리의 동양인들이 로비에 모였다. 유 지사와 김우중 대우 회장의 얼굴이 눈에 띄었다. 천신만고 끝에 외채 협상을 끝내고 세계경제포럼(WEF) 참석차 도착한 유 지사 앞에 김 회장이 다가왔다. 가벼운 얘기가 오가던 도중 김 회장의 목소리가 냉랭해졌다. 김우중과 관료, 잘못된 만남?김우중과 관료. 그들은 지독하게도 악연의 사슬로 얽혔다. 도대체 어떤 사연이 있었길래 그들은 하루 한 날도 좋은 얼굴로 마주 대하지 못했을까. 혹여 그들 사이의 잘못된 만남이 대우를 벼랑 끝으로 몰았던 것은 아닐까. 김우중회장과 강봉균 청와대 경제수석, 그리고 강수석의 바통을 이어받은 이기호 수석과 이헌재 금융감독위원장(아래) . 서로가 바라보는 눈길은 항상 싸늘했다. /서울경제 DB “기업이 죄인인가요. 왜 대기업 탓으로만 돌립니까. 환란은 금융 쪽에서 만들어놓고….” 유 지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유 지사는 외채 협상을 앞두고 “김용환 부총재와 동등 자격으로 보내달라”고 요구해 DJ 경제고문을 맡을 정도로 DJ의 신임이 두터웠던 인물. 새 정부의 실세에게 고개를 뻣뻣이 들고 대든 셈이었다. 관료들과 맺은 악연의 사슬. 하지만 이 때까지도 김 회장에게 관료는 말할 것도 없고 웬만한 정치인도 ‘별것 아닌 존재’였다. 옆에는 DJ라는 최고의 원군이 있었다. 그에게서는 ‘기업인’의 분위기보다 오히려 권력의 냄새가 풍겨질 정도였다. DJ 취임 2주일 전. 김 회장이 한덕수 통상산업부 차관(현 경제부총리)과 자리를 함께했다. 당혹스런 말들이 쏟아져나왔다. “한 차관. 통상압력을 막아주세요.” “구제금융을 받은 주제에 통상압력이라뇨. 그리고 조금 있으면 물러날 텐데 저에게 말하면 뭐합니까.” “모르는 말씀 마세요. 올해 적어도 400억달러 흑자 납니다. 미국이 가만 있겠습니까. 그리고 당신 물러나지 않습니다. 두고 보세요.” 김 회장은 이미 권력 상층부와 줄이 닿고 있어 인사내용까지 훤히 꿰뚫고 있는 듯했다. 장관급 관료를 지냈던 A모씨는 “(김 회장이) 당시 실세였던 P씨와 친분을 맺고 있는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 정권 초창기, DJ는 ‘눈에 보일 정도로’ 그에게 날개를 달아 주었다. 98년 1월13? DJ와 5대 그룹 회장간 회동. 김 회장은 해외출장 중이어서 참석하기 힘들다는 뜻을 알렸다. 5공 때 해체의 비운을 맞았던 한 그룹 회장이 “폭설로 길이 막혀 청와대 만찬에 늦게 참석한 것이 화근이었다”고 말했을 정도로 대통령 주재 모임에는 무조건 참석하는 게 불문율. DJ는 뜻밖의 반응을 보였다. “사업활동 때문이라면 불참해도 좋다.” 열흘 후 DJ는 김 회장을 따로 만났다. ‘500억달러 흑자론’이 담긴 노란 봉투가 전달된 것도 이때였다. 98년 7월4일에 열린 DJ와 전경련 회장단간 오찬간담회. 애정을 담은 듯 DJ는 “민(民) 주도가 나을 것 같다”며 김 회장에게 사회를 맡아줄 것을 요청했다. 김 회장에 대한 DJ의 신뢰도 관심을 모았지만 정작 눈길을 끈 것은 논의 주제였다. 바로 뜨거운 감자 ‘3각 빅딜안’이었다. 3각 빅딜은 권력의 한 축이었던 박태준 자민련 총재가 황경로 포스코 경영연구소 회장을 통해 만든 구조조정안. 현대는 석유화학을 LG에, LG는 반도체를 삼성에, 삼성은 자동차를 현대에 준다는 시나리오였다. 빅딜은 철저히 정치권 주도로 움직였다. 강봉균 경제수석 등 핵심 관료들조차 정확한 실체를 몰랐다. 관료들은 사실상 소외돼 있었다. 시계추를 다시 돌려 98년 3월27일 제1차 무역투자진흥 대책회의. 김 회장은 500억달러론을 다시 설파했다. “수출을 17% 늘리고 수입을 23% 줄여 524억달러 흑자를 낼 수 있습니다.” 연초 흑자목표를 30억달러로 제시한 관료들은 ‘책상물림’으로 내몰렸다. 김 회장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DJ만 보면 ‘500억달러’를 내세우며 무역금융을 풀어줄 것을 끈질기게 요청했다. 한 고위 관료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그는 대통령 면전에서 ‘(관료들이) 경제 현실을 무시하고 있다. 수출을 어떻게 하는지도 모른다’는 식으로 장관들에게 핀잔을 주는 일이 잦았어요. 고성까지 오갔으니까요. ” 전직 장관급 관료의 회고도 이와 비슷하다. “DJ는 여러 차례 500억달러론에 관심을 나타내며 강 수석을 나무랐습니다. 그때마다 강 수석은 김 회장을 과신하지 말라고 끊임없이 얘기했고요. 이때 이미 갈등이 한계에 이른 것 같아요. 외상수출로 장난치려 한다는 시각이 팽배했죠. ” 김 회장이 DJ 정권 들어 등장한 학자 출신의 진보적 관료들과 부딪치며 낸 파열음도 상당했다. 김태동 수석은 그 중심에 있었다. 김 수석은 방송에 출연, “세계경영을 한다는 분이 달러도 빌려오지 못한다”며 공개적으로 반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갈등은 98년 7월 꼭짓점으로 향했다. 관료들이 반격에 나선 것이다. 7월22일, 금융감독위원회는 이날 전격적으로 기업어음(CP) 발행한도를 제한했다. 대기업 중 한도를 넘어선 곳은 대우가 유일했다. 외상수출에 의존해온데다 은행들이 ‘국제결제은행(BIS) 비율 8%’라는 규율에 묶여 대출을 꺼린 탓이었다. 무역금융을 풀어주기는커녕 오히려 돈줄을 조이고 나선 것이다. 화가 난 김 회장은 31일 관훈클럽 간담회에 참석, 관료들을 향해 노골적인 불만을 쏟아냈다. “산업정책은 없고 금융정책만 있다. 옛날처럼 당하고만 갈 수 없다. 부채비율 200%가 말이 되느냐. 수출확대로 통상마찰을 불러온다고 해도 (상대국을) 설득하지 못한다면 (자리를) 그만둬야 하는 것이 아닌가.” 발언은 위험수위를 넘어서고 있었다. “기업이 얼마나 바쁜데 은행감독원ㆍ감사원ㆍ공정거래위원회까지…. 5~6곳에서 한 트럭분씩 자료를 내라고 한다. 짜증이 날 정도다.” 갈 때까지 가보자는 심산이었다. 관료들이 가만 앉아 있을 리 없었다. ‘사기꾼’이란 말이 거침없이 흘러나왔다. 10월28일, 이번에는 회사채 발행한도까지 묶었다. 대우로서는 손과 발이 다 묶여버린 셈이다. 대우 계열사의 자금을 담당하다가 경쟁사로 자리를 옮긴 P과장의 회고. “외환위기로 신용도가 떨어지면서 수출금융 시스템이 마비된 상황이었습니다. 단기 회사채를 발행해 자금을 조달할 수밖에 없었지요. 헌데 금감위가 규제에 나선 겁니다. 대우가 적자를 내고 있었던 것도 아닌데….” 당국자들의 발언은 사뭇 다르다. 금감원에서 자금상황을 모니터링하던 J씨의 발언. 그는 권력 상층부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제가 듣기에 적어도 정치적 의도는 없었다고 단언합니다. 대우의 CP와 회사채가 98년 하반기 들어 워낙 급격하게 늘어났습니다. 이대로 두면 큰일 나겠다 싶더군요.” 갈등수위가 높아지는 만큼 자금상황도 빠르게 나빠졌다. 대우가 사채시장을 기웃거린 것도 이 즈음이었다. 하지만 관료들은 “IMF 때문에 무역금융을 늘려주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대통령을 끈질기게 설득했다. 금감위의 발걸음도 빨라지기 시작했다. 12월, 금감위 내부에서는 대우 워크아웃에 대한 검토작업이 극비리에 이뤄졌다. ‘김우중 버리기’는 이렇게 진행되고 있었다. 99?초. 관계는 극단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연불 수출분 중 네고가 안된 50억달러와 시설재 수출분 40억달러에 대해 금융지원을 해달라고 끊임없이 건의했지만 허사였다. 당시 청와대에 몸담고 있었던 현직 관료는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99년 초에도 그 양반은 청와대를 뻔질나게 들락거렸어요. 올 때마다 메모지를 한 장씩 들고 오더군요. 원화 얼마, 외화 얼마 등이 필요하다는 글귀가 적혀 있었어요. 다녀갈 때마다 어른을 말리느라 혼이 났습니다.” 갈등은 씻기 힘들 정도로 커져갔고 그런 동안 DJ는 관료들에게 포위돼갔다. ‘인(人)의 장막’이었다. 그리고 대우가 사실상 붕괴된 99년 7월, DJ마저도 김 회장에게 등을 돌렸다. 대우 계열사의 전 자금담당 임원이 전한 상황은 갈등의 정도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회장께서는 나중에는 ‘내가 사라지면 대우는 괜찮을 것’이라는 말까지 꺼내더군요. 그것마저도 선견지명이 있었나 봅니다. 나중에 워크아웃에 들어가니까 금세 풀리더군요.” 그는 “그때 (수출금융을) 해주는 시늉이라고 했다면…”이라며 쓴맛을 다셨다. 망하지 않게 하겠다는 사인을 은연중에라도 시장에 보냈으면 운명이 달라졌을 것이라는 아쉬움에서였다. “분식회계 등 용서받지 못할 과오를 저지른 것에는 할 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정권 등에 의해 인위적으로 자금동원 능력이 급격하게 떨어진 것도 사실 아닙니까. 투신사에 들어간 공적자금의 절반이라도 熾幣蠻少囑窄窈?” 대우맨들의 회한. 하지만 어쩌랴, 김 회장이 그토록 싫어했던 ‘책상물림’들도 선진국과 그 휘하에 있는 IMF의 ‘보이지 않는 안테나’에 조종을 받고 있었던 것을…. 입력시간 : 2005/06/22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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