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의 시간은 더디게 간다<br>■ '국제 슬로시티' 경남 하동<br>화개장터~쌍계사 '십리벚꽃' 장관 '토지' 최참판댁 섬진강한눈에<br>큰 일교차 배수 잘 돼 차 재배 최적
| 화개장터에서 쌍계사로 이어지는 '십리벚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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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참판댁(사진 위) 화개장터(아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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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하동군 악양면 들판에는 비닐하우스가 없다. 농작물을 빨리 자라게 하는 인공 재배 대신 좀 더디더라도 자연 그대로의 환경에서 먹을거리를 길러내려는 하동 사람들의 인생 철학 덕분이다.
하동의 야생 수제 차는 재배, 수확, 가공에 이르는 전 과정에 걸쳐 사람의 손길로만 만들어져 특유의 깊은 맛을 더한다.
볼거리가 많기로 유명한 경남 하동이지만 하동을 둘러본 후 머릿속을 맴도는 단어는 '느림의 미학'이었다. 지난해 하동군 악양면이 녹차 재배지 중 세계 최초로 '국제 슬로시티(Slow City)'로 인증받은 이유이기도 하다.
◇하얗게 내리는 '꽃비' 속으로= 4월이 되면 경남 하동군 화개면에는 새하얀 '꽃비'가 내린다. 화개장터에서 쌍계사에 이르는 약 4km 거리에 흩날리는 벚꽃이 장관을 이뤄 '십리 벚꽃'으로 잘 알려진 길이다. 사랑하는 청춘 남녀가 두 손을 꼭 잡고 걸으면 백년해로한다고 해 일명 '혼례길'이라고도 불린다.
지난 1일 기대를 품고 찾은 경남 하동은 '꽃비' 대신 봄비가 내렸다. 예년 같으면 한창 만개한 꽃잎을 뽐내며 상춘객 맞이에 나섰을 벚꽃이 게으름을 피우고 있었다. 매년 벚꽃축제가 열리는 화개면 화개장터 인근은 전체 벚나무의 10% 정도만 꽃을 피워 구경 간 사람들의 애를 태웠다.
계속되는 이상기후로 올해 벚꽃의 개화가 작년보다 다소 늦어진 탓이다. 하지만 상당수 벚나무들이 한 가득 꽃망울을 맺은 것으로 보아 이번 주말쯤이면 새하얀 '꽃비'가 눈이 부시게 내릴 것으로 보인다.
벚꽃길의 시작점인 화개장터는 가수 조영남의 노래 가사처럼 전라도와 경상도를 이어주는 대표적인 전통시장으로 유명하다.
해방 전까지만 해도 화개장터는 지리산의 화전민, 전남 구례와 경남 함양의 내륙지방 사람과 여수, 광양, 남해의 해안가 사람, 각지를 떠돌던 보부상 등 전국에서 몰려든 상인들로 문전성시를 이루며 우리나라 5대 시장 중 하나로 꼽혔던 곳이다.
당시의 명성이 퇴색된 지는 오래지만 5일장으로 운영되던 화개장터가 몇 해전부터 상설 운영장터로 탈바꿈할 만큼 관광객들의 발길이 늘고 있다. 십리 벚꽃길을 따라 걷다 보면 어느덧 쌍계사에 다다른다.
쌍계사는 국보 1점과 보물 3점의 국가지정 문화재 외에도 금강문과 청학루, 마애불, 칠불암 등 문화유산들이 가득한 사찰이다. 쌍계사에 들어서면 맨 먼저 일주문이 반겨준다. 속세를 떠나 부처의 세계로 들어가는 첫 관문이라는 일주문을 지나는 순간 속세의 무거운 짐을 벗어놓은 듯 잠시나마 홀가분한 마음이 든다.
◇소설 '토지'의 주인공이 되어볼까= 경남 하동은 우리나라의 현대문학 역사상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손꼽히는 '토지'의 주 무대가 된 곳이다. 지난 2008년 작고한 소설가 박경리 선생의 '토지'는 동학농민전쟁 이후 1945년 해방에 이르기까지 한 많은 우리 민족사를 담은 대하소설로, 경남 하동 평사리가 배경이다.
평사리 상평마을에 위치한 최참판댁은 연간 10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다녀갈 정도로 하동을 대표하는 관광명소 중 하나다. 본래 극중 주인공 서희가 살던 최참판댁은 평사리에 존재하지 않는 허구의 공간이었다. 소설을 읽고 평사리를 찾은 관광객들이 허구임을 알고 아쉬워하자 하동군은 평사리의 3,000여평 부지에 최참판댁을 비롯해 한옥 14채를 지어 소설 속 상상의 공간을 현실로 재현해냈다.
특히 최참판댁은 드넓은 들판과 굽이굽이 흐르는 섬진강 물줄기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명당 자리에 자리잡고 있어 방문객들의 가슴 속까지 시원하게 만들어준다. 윤씨 부인과 서희가 기거했던 안채에서부터 최치수의 기침소리가 들리는듯한 사랑채, 김환과 야반도주한 별당 아씨가 머물던 연못 딸린 별당, 정원의 조경수 하나까지도 소설 속 장면과 거의 똑같을 만큼 세심하게 만들어 금방이라도 소설 속 주인공들이 여기저기서 뛰쳐나올 것만 같다.
최참판댁 뒤쪽에는 '토지' 외에도 하동을 무대로 한 다른 문학작품들을 살펴볼 수 있는 평사리 문학관도 있어 자녀들과 함께하는 문학여행지로도 손색이 없다.
◇우리나라 차(茶)의 고향= 하동에는 국내에서 가장 먼저 차를 심어 재배한 '차 시배지'가 있을 정도로 우리나라 차의 본고장이다. 쌍계사 입구에 세워진 신라 견당사 김대렴공의 '차시배추원비'가 이를 증명한다.
통일신라시대 흥덕왕 3년(828년)에 당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김대렴공이 당 문종왕에게 선물받은 차의 종자를 왕명에 따라 이 곳에 심은 것이 우리나라 차의 시초로 알려져 있다. 이후 하동 화개골을 중심으로 재배되기 시작한 차는 고려와 조선시대에 걸쳐 왕에게 진상될 만큼 뛰어난 품질을 인정받아 '왕의 녹차'로도 불린다.
하동은 섬진강과 화개천을 비롯한 여러 지류가 만나 생기는 안개가 햇빛과 습도를 조절해 차나무가 자라기에 적합한 조건을 갖고 있다. 또 큰 일교차와 물이 잘 빠지는 토질은 차의 맛을 더욱 깊게 해준다. 하동의 차 재배면적은 전국의 약 23%, 재배농가는 전국의 35% 가량을 차지할 정도로 국내의 대표적인 차 재배지 중 한 곳이지만 정작 생산량은 전국의 13%에 불과하다.
기계 대신 대부분 손으로 직접 따고 덖는(불에 타지 않을 정도로 볶아서 익히는) 수제차이다 보니 대량생산이 힘들기 때문이다. 봄의 따스한 햇살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녹차의 정취를 느끼고 싶다면 하동 정금리의 '도심다원'을 추천할만하다. 이 곳은 광활하면서도 잘 정돈된 녹차 밭을 떠올린 여행객이라면 다소 실망할 수도 있다.
대단위로 재배한 녹차를 기계로 빠르게 수확하기 위해 밭고랑을 고르게 잘 다듬어놓은 녹차 밭과 달리 이 곳은 야생에서 자란 녹차를 수작업으로 만들어내기 때문에 녹차 밭이 반듯하게 정렬돼있지 않다. 하지만 가파른 경사 위에 조성된 푸른 녹차 밭과 그 사이로 군데군데 피어있는 매화가 조화를 이루고 있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 같다.
오는 5월 1~5일 화개면 일대에서 열리는 '제15회 하동 야생차문화축제'는 하동 차의 매력을 느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왕의 녹차! 느림, 비움, 그리고 채움'이라는 주제의 이번 행사에서는 신비의 야생차와 다도를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체험해보는 '최참판댁 오색 찻자리'를 비롯해 전국 3,000명의 차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대한민국 차인 한마당'과 '섬진강 달빛차회', 차 명상여행' 등 다양한 차 문화 체험 프로그램들이 마련된다.
◇대표 먹거리= 하동의 대표 별미는 단연 재첩이다. 1급수를 자랑하는 섬진강에 서식하는 하동의 재첩은 빛깔이 선명한데다 육질이 연해 맛과 영양 모두 전국 으뜸으로 친다. 특히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섬진강 어귀에서 자란 재첩으로 끓인 하동 재첩국은 뽀얗게 우러난 우유빛깔과 더불어 알싸하면서도 짭짤한 맛이 일품이다. 예로부터 재첩은 간질환이나 황달에 효과적이고 병후 쇠약한 사람을 보하는데 좋다고 알려져 있다. 동의보감에도 '재첩은 눈을 맑게 하고 피로를 풀어주며 특히 간 기능을 개선하고 위장을 맑게 해준다'고 씌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