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50대 외국 항공사 여성 스튜디어스가 낯설게 느껴지는 많은 한국인들의 생각은 일면 학습의 결과다. 그러나 그들이 20대, 그것도 예쁜 여성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 속에는 성, 특히 연령에 대한 우리의 무의식적 편견이 숨어있다. 출신교로 사람의 수준을 평가하고 경상도 전라도로 인성을 재단하는 것도 모자라 이제 나이로 편 가르는 나라. 학번이 어떻고 띠가 어떻고 기어코 ‘나이 족보’를 알아야 직성이 풀리는 우리의 관성은 변종(變種) 한국식 ‘강박증’이다. 이 나라 주류 문화의 한 단상을 보자. 영화계에서 이름을 날리는 한 인사의 말이다. “대한민국 대중문화란 건 그저 20대 만을 위한 ‘굿 판’이다. 그런 저런 영화들의 지향점은 20대 여자가 남자 친구에게 ‘저 영화 어때 ?’라는 말에 포인트를 맞춰 만들어 지는 게 대부분”이라는 그의 지적은 시니컬하다. 국민들 의식에 절대 영향을 주는 TV. 역시 20대 전후 감성의 틀에서 프로그램 편성의 범주가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대중 문화라는 한 영역만을 통해 본 나이, 특히 젊음에만 종속된 이 같은 우리 사회의 행태적 폐쇄성은 한국인들의 삶 전체를 통해 이미 너무도 깊숙이 용해된 우리 시대 부인키 어려운 자화상이다. 사람의 삶이 불행해지는 요인들엔 어떤 것들이 있을까. 그 중 하나. 우리 삶의 무게 중심이 앞쪽으로만 쏠려 있음으로 인한 문제다. 20~30대 만이 인생의 황금기라면 남아있는 그 많은 시간들이 어쩐지 서글퍼 진다. 반면 인생 후반부가 희망과 성취감으로 채워진다면 삶은 보다 지속적으로 역동적이고 목표 지향적일 듯 싶다. 누구나가 겪게 될 ‘나이 먹는 것’이 부끄럽고 사회 생활에 ‘꼬리표’가 되는 사회라면 과연 그런 사회는 누구를 위한 사회일까? 그 폐쇄성이 의식에 코드화가 돼 있는 한 개인은 물론 국가의 성숙은 ‘어불성설’이다. ▦사회 다른 분야 보단 산업계, 특히 기업의 경우 구성원들 나이에 민감할 수 밖에 없는 구조적 특성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기업의 목표는 무엇보다 이윤 창출이고 생산성이 경영의 관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젊은 인력과 기업 이윤의 상관관계도 다시 정리돼야 할 부분이 있다. 또 그 같은 계산에 앞서 피할 수 없는 고령화 상황, 맞닥뜨린 여건을 기업 경영에 유리한 쪽으로 어떡하든 바꿔보려는 적극적 대응이 무한 경쟁의 시대를 사는 기업이라면 가져야 할 자세이기도 하다. 정부 차원에서 거시 경제 운영의 틀을 시급히 고령화 체제로 전환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리고 미시적으론 산업계, 기업들의 발상의 전환이 못지 않게 중요하다. 고령자의 노련한 실무 경험을 살릴 수 있는 구조, 그리고 모든 연령 대 인력이 산업 현장에서 적응할 수 있도록 노동 환경을 바꾸어 줄 필요가 있다. 이를 테면 30대 위주로 디자인된 업무 방식을 고령화 시대에 맞도록 재 설계하는 등의 일이다. 기업 문화에서도 새 바람은 불어야 한다. 도요타 등 일부 일본 회사들의 경우 나이나 직함과 관계없이 회사 내에서 ‘~씨’를 쓰자는 이른바 ‘산즈께’ 운동을 펼치고 있는 것은 그 같은 차원의 작은 사례다. 미국 기업들의 경우도 고령 근로자를 위한 직장내 문화 바꾸기가 마치 유행병처럼 번져 나가는 추세다. 한국의 경우 기업들은 글로벌화의 선두주자였다. 세상이 아우성 칠 때 시대와 완벽히 맞지 않는 우리 의식 속 ‘연령주의’(Ageism)를 또 한번 기업이 앞장서 먼저 그 벽을 허물어 보면 어떨까. 특히 고용에서부터 ‘나이 강박증’을 극복해 나갈 수 있다면 ‘한국=나이 공화국’의 시대착오적 등식도 깨질 수 있지 않을까. 우리보단 훨씬 정도가 덜함에도 기업의 연령 제한을 제도적으로 막고 나선 영국. 최근 토니 블레어 정부가 만든 슬로건은 바로 우리 기업들을 위한 고언(苦言)의 소리다. “나이, 그거 왜 묻습니까? ”(Age, Wh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