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정책

[아듀 2014, 인물로 본 갑오년] <2> 이주영 전 해수부 장관

'팽목항 지킴이' 감동 남기고 떠나다

217일간 현장서 사고 수습… "실종 9명 사진 여전히 품에 지녀"

/=연합뉴스

이주영 전 해양수산부 장관이 24일 오후 정부세종청사 대강당에서 열린 퇴임식에서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을 하는 동안 직원들이 ''장관님!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라는 플래카드를 펼쳐 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간이침대만 들고 팽목항 직행 "제가 죄인… 잘못했습니다"

실종자 슬픔 온몸으로 받아내 진정성에 유가족도 마음 열어


"편안할 때도 위기 대비하라" 직원들에 마지막 당부 남겨


반백에 절뚝거리는 걸음. 24일 이주영 해양수산부 장관이 퇴임식 단상으로 올라가는 뒷모습은 아름다웠다. 비록 몸은 지치고 힘들어 보였지만 그가 있었기에 세월호 참사로 갈기갈기 찢긴 국민들의 마음이 그나마 치유될 수 있었다. 이 전 장관은 팽목항 지킴이다. 지난 4월 세월호 참사 이후 217일 동안 팽목항에 머물며 희생·실종자 가족의 곁을 지켰다. 그동안의 고생 탓일까. 흑발이던 머리는 하얗게 세버려 이제는 치렁치렁한 반백이 됐다. 그럼에도 그는 "책임과 합당한 처신을 위해 장관직에서 물러나지만 마음 한켠의 짐이 아직도 너무나 무겁게 느껴진다"며 쉬 발길을 떼지 못했다.

이 전 장관은 취임한 지 불과 두달여 만에 대한민국을 송두리째 뒤흔든 세월호 참사를 겪었다. 세월호 사건은 우리 사회의 '적폐(積弊)'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현장을 지휘하고 책임져야 할 선장은 누구보다 앞서 배를 버렸다. 부정부패로 얼룩지고 무능으로 점철된 국가 안전체계도 속절없이 무너졌다. 사고를 수습하고 실종자 가족을 감싸 안아야 할 공직자는 잘못된 언행으로 공분을 키웠다. 바다 밑으로 가라앉은 304명 목숨의 무게만큼 우리 사회도 무겁게 침잠했다. 모든 국민이 참사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눈물을 멈추지 못했고 미처 꽃을 피우기도 전에 스러진 단원고 학생들을 안타까워하며 기성세대 모두가 자책했다. 경기마저 고꾸라졌다. 그렇게 온 나라가 슬픔에 빠졌지만 정작 책임지겠다고 나선 이는 없었다. 버려진 세월호와 유가족 곁에 접이식 간이침대만 달랑 들고 자리를 잡은 사람이 바로 이 전 장관이었다.


9월1일 정부세종청사. 세월호 사고 이후 139일 만에 집무실로 잠깐 돌아온 이주영 해양수산부 장관은 '연안여객선 안전관리혁신대책'을 발표했다. 다시는 세월호 같은 참사가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엄숙한 마음에 마련한 대책 발표 와중 그는 갑작스레 울먹였다. 취재진이 '실종자 사진이 있느냐'는 질문을 던졌고 품에 간직하던 10명의 사진을 꺼내 들면서 갑자기 마음이 찡해진 탓이다. 이 장관은 "가족들이 꼭 찾아 달라고 (사진을) 맡긴 것이라 제가 품에 안고 최선을 다해 찾아드리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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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10명 중 1명은 돌아왔지만 아직 9명이 차가운 바닷속에 남아 있다. 이 장관은 퇴임하는 순간에도 "9명의 사진은 여전히 품에 지니고 다닌다"고 말했다. 언제까지 지니고 있을 거냐는 질문에 먹먹해진 모습으로 뒷말을 잇지 못했다. 세월호의 희생자와 유족은 이미 그에게는 한몸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그런 그에게 차가운 바닷속에 있는 희생자 9명은 오죽했을까.

사실 그는 사건 수습 초기 유가족에게 그저 '멱살 잡을 공무원' 중 하나일 뿐이었다. 이 장관은 "너 때문에 우리 애가 죽었다"고 울부짖는 유가족에게 "제가 죄인입니다. 잘못했습니다"라며 마냥 머리를 숙였다. "피하려고 하면 가족들의 분노가 갈 데가 없다. 욕하면 욕하는 대로 멱살 잡히면 잡히는 대로 사고를 수습하겠다." 실종자 가족의 불신과 분노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그가 취재진에게 한 말이다.

사고 진상규명을 위해 농림해양수산식품위원회 현안보고에 참석하라는 국회 요청을 유가족들을 돌봐야 한다는 이유로 거절한 사실은 유명하다. 암으로 투병 중이던 단원고 희생 학생 어머니가 치료비가 없어 곤란한 처지라는 소식을 듣고는 정몽준 새누리당 의원에게 전화를 걸어 문제를 해결해줬다는 후문도 전해진다.

이 같은 이 장관의 진정성에 냉랭하던 유가족의 태도도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6월 개각 당시 교체 '0순위'였던 이 장관이 유임됐던 것도 바로 유가족의 요청 때문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장관이 없으면 수색작업이 이뤄질 수 없다는 유가족들의 걱정 탓에 그는 하루도 팽목항을 떠날 수 없었다. 8월6일 세월호 사고 이후 처음으로 주재한 확대간부회의도 진도~세종을 연결하는 화상회의로 진행했을 정도다.

그렇다고 마냥 장관의 업무를 미뤄놓을 수만도 없는 것. 이 장관은 9월1일 사건 발생 139일 만에 처음으로 장관 업무로 복귀한다. 그동안 시나브로 얻어낸 유가족의 신뢰가 그 바탕이었다. 이 장관은 "사고 직후에는 많은 가족들이 진도에 머무는 나를 의구심 가득한 시선으로 봤지만 계속 남아서 일하는 모습을 보면서 서로 신뢰가 생긴 같다"며 "가족들에게 정말 고맙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하지만 끝내 남은 실종자 9명의 시신을 찾지 못한 채 사건 발생 217일 만인 11월18일 결국 범정부사고대책본부는 철수하게 된다. 그가 떠나는 발걸음을 쉬이 떼지 못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해수부 직원들에게 "'거안사위(居安思危·편안할 때도 항상 위기에 대비하라)'의 새로운 정신자세가 얼마나 중요한지 한순간이라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당부를 남겼다. 그리고 "고맙습니다"라는 직원들의 배웅을 뒤로한 채 정계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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