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군으로 꼽히는 세종과 성종시대에는 어우동사건을 비롯, 유난히 섹스스캔들이 끊이지 않았는데, 여성들의 프리섹스가 보장되었던 고려의 풍속이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더불어 12명의 비빈을 거느렸음에도 자주 궐 밖으로 나가 기생놀음을 즐긴 성종의 색탐도 한몫을 단단히 했는데, 성종은 음풍(淫風)에 무척 관대했던 임금이었다.
해서 기생들을 멀리하라는 신하들의 상소에 골머리를 앓았으니, 가장 강경하게 군주의 도리를 호소하는 신종호를 버릇들이기로 결심했다. 신종호는 과거제도가 생긴 이래 처음으로 세 번에 걸쳐 장원을 차지해 칭송이 자자했던 강직한 인물이었다.
성종은 여색으로 신종호의 입을 막아야 마음껏 풍류를 즐길 수 있다고 판단하고, 암행어사에 임명해 평안도로 보냈다. 평안도에 당도한 신종호는 수령들이 마련한 술자리 조차마다하고 공무에 여념이 없었으나, 성종의 덫에 걸려들고 말았다.
선천부사가 임금의 밀명에 따라 신종호의 처소 옆집에 아리따운 기생 옥매향을 투입했기 때문이다. 소복을 곱게 차려입은 옥매향이 달빛을 받아 더욱 요염해진 자태로 낮은 담장앞을 거닐며 유혹했으니, 목석 같은 손종호도 넘어갈 수밖에. 결국 신종호는 옥매향과 꿈같은 하룻밤을 보내고‘비도 안 온 골짜기 축축도 하이… 새콤하기가덜익은 살구 맛이네.’라며 감탄을 했다.
신종호는 옥매향의 새콤한 살송곳 맛을 부채에 일필휘지하여 신표로 건네며, 때가 되면 반드시 부를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리고 한양으로 돌아와 성종에게 어사의 임무를 마치고 왔음을 고했다. 그러자 성종이 객고에 수고가 많았다며, ‘평안도 선천은 천하절색의 기생이 많이 배출되는 색향인데 별 일이 없었느냐?’고 하문했다.
신종호가 옥매향과 나눈 사랑으로 우물쭈물하자, 성종이 품에서 부채를 꺼내더니 낭랑한 목소리로 그가 선천에서 지은 시를 읊었다. 그러면서 당대의 문장가가 이처럼 음탕한 시를 쓴 연유가 무엇이냐며 놀리더니, 옥매향을 첩으로 삼아 평생토록 살구맛을 즐기라고 했다. 이 일이 있은 후로 신하들이 더 이상 성종의 풍류를 논하지 못했으니, 가히 성종은 성에 있어서도 현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성종이 옥매향을 미끼로 신종호의 절개를 꺾은 것은 자신의 호색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성종은 바른 정치란 흐르는 물처럼 자연스러워야 한다고 여겼으니, 백성을 다스리는 관리들이 인간의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성에 대해 경직된 태도를 갖는다면, 올바른 정사가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성종의 사례에서 보듯 성적으로 불만이 쌓이거나 콤플렉스를 갖고 있으면 사회생활이 온전할 수 없다. 따라서 성기능 장애로 활달한 부부생활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면 속히 전문의의 상담을 받는 것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