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토요산책] 인간 이순신을 기억하자


4월28일은 이순신 장군 탄신 468주년이 되는 날이다. 이날을 맞아 그분의 고난에 찬 일생을 다시 한 번 되새겨보게 된다. 장군은 정유재란이 끝나가던 1598년 11월19일(음력) 마지막 싸움인 노량해전을 승리로 이끌고 적탄에 맞아 장렬히 순국했다. 뒷날 그가 일부러 갑옷을 입지 않아 자청하다시피 적탄을 맞았다고 자살설도 나왔고 전사를 가장해 그 뒤 16년간이나 속세와의 모든 인연을 끊고 어딘가에서 숨어 살았다는 은둔설도 나왔다. 하지만 이는 모두 이순신 장군을 욕되게 하는 황당무계한 주장이다.

투철한 생사관·국가관으로 산 영웅


특히 자살설은 정황증거로 제시된 몇몇 그럴듯한 이유 때문에 은둔설에 비해서 공감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신빙성이 좀더 높다고 본 것이다. 당시 국왕 선조가 의병장 김덕령을 죽이고 곽재우와 이순신마저 죽이려고 했던 처사에 비춰볼 때 이순신이 스스로 목숨을 버렸다고 보기에 무리가 없는 듯 했다.

선조가 자질이 한참 부족한 군왕이란 사실은 임진왜란 뒤 공신 선정에서도 잘 나타났다. 공신은 선무공신(무관)이 18명이고 호성공신(문관)이 86명이었다. 목숨을 걸고 싸우다 죽은 군인보다 피난길에도 당쟁을 멈추지 않았던 문관들에게 임금을 수행하느라고 고생했다며 무더기로 공신호를 내렸던 것이다. 더욱 기막힌 사실은 곽재우ㆍ김덕령ㆍ고경명ㆍ조헌 등 빛나는 무공을 세운 의병장은 단 한 사람도 끼지 못한 반면 내시가 24명이나 됐다.

원균도 처음에는 1등공신이 아니라 2등이었다. 공신도감도제조, 즉 공신선정위원회의 위원장 격이던 이항복이 선무공신을 정할 때에 원균을 김시민ㆍ이억기 등과 함께 2등으로 올렸는데 선조가 이순신ㆍ권율과 같은 1등으로 바꿨던 것이다. 그때 선조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일찍부터 원균을 지혜와 용맹을 겸비한 사람으로 여겼으며… 이제 원균을 오히려 2등으로 낮춰 책정했으니 어찌 원통한 일이 아니겠는가. 원균은 지하에서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선조가 원균을 1등으로 올려준 것은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면하고 원균을 그 자리에 앉힘으로써 칠천량전투에서 참패해 조선 수군을 전멸시킨 자신의 궁극적 책임을 회피하려는 술수였다.

이순신 자살설은 사실 선조의 이런 처사에서 비롯됐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선조는 국가를 멸망의 위기에서 구한 이순신에게 감사하기는커녕 자신의 실정과 실책을 덮기 위해 미워했다는 점은 실록의 여러 기록이 분명히 전해준다. 이런 변덕과 증오심이 결국 이순신으로 하여금 자살과 같은 순국으로 몰고 갔다는 논리이다.


선조실록을 보면 이런 설에 수긍이 가는 대목이 몇 군데 나온다. 이를테면 명량해전 뒤인 1597년 10월20일에 선조가 말하기를 "이순신은 사소한 적을 잡은 데 불과하다. 그는 자신의 직분을 수행한 것일 뿐 큰 전공을 세운 것은 아니다."라고 한 것이 대표적이다.

관련기사



고작 전선 13척으로 왜적의 함대 133척을 격멸해 서해로 북상하려는 적의 대군을 저지한 명량해전, 전쟁의 물길을 돌려 국가를 멸망의 위기에서 구한 명량대첩을 형편없이 평가절하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또 선조는 이듬해 4월에는 "이순신에게 벼슬을 올려주지 않으면서 상을 주는 방법을 강구해보라"고도 했다.

반면 비변사에서 '원균은 수군의 주장으로서 수군을 전멸시켰으므로 그 죄는 모두 원균에게 있다'면서 처벌을 건의하자 원균을 감싸고돌면서 패전의 책임을 묻지 않았다. 그러자 사관은 이렇게 통렬히 비판했다.

"한산도에서 남김없이 패전한 원균은 시장에서 사지를 찢어 처형해야 마땅하다. 또 수군이 죄가 없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원균은 성질이 포악한 일개 무지한이다. 이순신을 모함해 몰아내고 통제사가 됐으며 단번에 적을 섬멸하겠다고 큰소리를 쳤으나 지혜가 부족해 패전했다. 그러고서는 배를 버리고 육지로 도망가는 바람에 장병들을 모두 죽게 했다. 이런 원균의 죄를 누가 벌줘야 하는가. …이런 일을 보니 머리가 터질 것 같고 뼈가 녹아버리는 것 같다."

선조는 비정상적 성격의 인물이었다. 자신이 적통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왕위를 이었다는 사실에 자격지심도 있었다. 의심과 시기심이 많고 독선적이었다. 선조의 이러한 증오에 가까운 미움과 시기심에 대해서 이순신이라고 모를 리가 없었을 것이다. 전에 선조가 무고한 김덕령을 죽인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이순신은 자신이 전쟁이 끝난 뒤까지 살아남는다고 해도 결국은 선조의 마수에서 무사할 수 없다는 것을 절감했을 것이다.

명량해전 뒤에 받은 면사첩(免死帖)이란 게 있기는 하지만 변덕스러운 선조에게 그 따위 것은 백장이 있어도 소용없을 것이다.

자살설로 욕되게 하지 말아야

그래서 이순신이 택한 길이 자살과 마찬가지인 전사, 또는 전사를 자초한 자살이었다는 추론이다.

그러나 이순신의 자살설이나 은둔설은 모두가 그의 투철한 생사관ㆍ인생관ㆍ국가관 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데서 나온 주장이다. 이순신의 54년에 걸친 일생은 죽을 곳과 때를 찾아 다닌 고행과 다름없었다. 그런 이순신이 좀더 살기 위해서 전사를 가장하고 숨어서 살았겠는가. 자살설이나 은둔설 모두 이순신을 두 번 죽이는 허황한 말장난에 불과하다.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