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기자의 눈] '선의의 피해자' 양산하는 청약제도

“두번 다시 청약통장 안 만들 겁니다.” 정부의 청약제도 개편에 두번째 ‘배신감’을 맛본 어느 통장 가입자의 ‘각오’다. 그는 국제통화기금(IMF) 이후 청약제도 완화로 청약 ‘0순위’로 불리던 무주택우선공급기회를 써보지도 못하고 날려버렸다. 그는 어렵사리 강북권의 아파트에 당첨된 후 다시 통장에 가입해 이제 집을 조금 넓혀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는 다시 ‘청약가점제’라는 정부 제도 개편 앞에 허탈감을 느끼고 있다. 무주택자도 아니고 자녀가 많은 것도 아니니 가점제로 따진다면 순위가 밀려도 한참 밀리기 때문이다. 청약제도 손질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IMF 체제로 집값이 반토막 나면서 주택건설 경기가 붕괴 지경에 이르자 정부가 시장을 살리겠다고 배수제와 무주택우선공급을 없앤 지 10년도 채 안됐다. 참여정부 들어 청약통장 가입 요건을 다시 강화해온 정부는 오는 9월 ‘청약가점제’ 시행을 앞두고 구체적 방안 마련을 서두르고 있다. 청약가점제는 기존의 동일 순위 내 추첨제의 틀을 흔들고 무주택기간, 소득, 자녀 수 등에 따라 청약자들의 순위에 차등을 두는 제도다. 기존 통장 1순위자들 중 상당수가 순위에서 밀려 사실상 청약 자격을 상실할 가능성이 높아진 셈이다. 정부 안팎에서는 청약가점제 도입으로 기존 가입자들이 입을 불이익을 ‘최소화’하기 위한 다양한 방안을 마련 중이다. 하지만 정부가 어떤 보완장치를 마련하든 기존 가입자들이 받는 불이익과 이에 따른 불만을 해소하지는 못할 것은 명약관화다. 청약통장 가입자들은 최소한 1순위 자격을 얻게 되는 2년 후를 내다보며 내 집 마련을 설계해온 사람들이다. 예ㆍ부금이 2년이지 불입액과 납입 횟수로 순위를 따지는 청약저축 가입자들은 더 오랜 기간 내 집 마련을 착실히 준비해온 서민들이다. 과거 무주택우선공급을 폐지할 때 한 민원인이 건설교통부 실무자에게 항의했을 때 들었던 답변이 있다. “통장을 쓰지 않고 묵혀뒀냐”는 것이었다. 청약가점제로 손해를 보게 된 가입자들이 또다시 항의한다면 이번에도 정부가 할 수 있는 대답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수 년 동안 정부 정책을 믿고 청약통장을 만들었던 수요자들에게 마치 신용카드 마일리지를 기한 내에 사용하듯 통장을 쓰라고 한다면 대출도 꽁꽁 묶여버린 상태에서 수억원의 목돈을 갑자기 마련해 청약에 나설 수 있는 가입자들이 몇이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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