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7년 11월 프로복서 홍수환은 파나마에서 세계 복싱역사에 길이 남을 명승부를 남겼다.
상대는 지옥의 악마라는 별명을 갖고 있던 당시 WBA주니어페더급 챔피언 헥토르 카라스키야. 홍선수는 2회에 소나기 펀치를 맞고 무려 4번이나 다운을 당했다. 가망이 없어보였지만 그때마다 일어섰다. 그리고 3회가 시작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챔피언을 몰아쳐 48초 만에 링에 뉘었다. 통쾌한 역전 KO승. 그는 영웅이 됐고 ‘4전5기’(四顚五起)는 그대로 신화가 됐다. 불굴의 투지의 상징으로.
경제주체들 자신감 약화
거의 30년 전의 기억을 새삼 떠올리는 것은 요즘 경제상황이 하도 답답해서다. 4전5기의 신화를 기대해보지만 안타깝게도 경제에는 그게 통하지 않는 것 같다. 고전할 만큼 했으니 이제 기력을 차릴 법도 한데 반대로 점점 활력을 잃어가고 있다.
더불어 국민들도 지쳐가고 있다. 경기가 조금 좋아지는 듯하다 다시 고꾸라지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경제회복에 대한 믿음이 약해지고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경제난 자체도 걱정이지만 경제주체들의 자신감 상실은 더욱 큰 문제다. 경제는 심리라고 하지 않는가. 국민들의 의욕저하는 자칫하면 경제를 실제보다 훨씬 더 어려운 지경으로 몰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올들어 반짝했던 경기가 요즘 들어 다시 심상치 않은 국면을 맞고 있다. 지난해 이맘때의 재판이다. 급기야 성장률 5% 달성이 불가능하며 일본식 장기불황에 빠질 것이라는 우려까지 제기됐다. 그것도 다른 사람이 아닌 경제정책의 사령탑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경제가 심상치 않은 정도가 아니라 위기국면인 셈이다.
특히 대통령과 정부가 ‘경제 올인’을 선언하고 웬만한 정책은 다 동원했는데도 경기가 이 모양이라는 것이 문제의 심각성을 더해준다. 한국은행은 지난해 하반기에만 두 차례나 금리를 내렸다. 고유가로 인한 물가상승 압력, 부동산 급등 등 금리인상 요인에도 불구하고 내린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경기부양을 위해서였다. 정부는 지난해 하반기에 추경예산ㆍ기금 등을 동원해 모두 4조5,000억원의 재정을 추가 투입했고 올들어서도 예산을 조기에 집중적으로 쏟아부었다.
특별소비세 등 부분적인 세금인하 조치도 병행됐다. 그렇게 해서 얻은 1ㆍ4분기 성적표가 성장률 2.7%였다. 2ㆍ4분기도 이와 비슷할 것이라고 한다. 금리ㆍ재정ㆍ세제 등의 정책으로 경기를 살리는 데 한계가 있음을 고스란히 드러낸 것이다. 백약이 무효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아무래도 안되면 발상을 전환하고 눈을 돌려야 한다.
투자확대에 정책초점 맞춰야
해법은 역시 기업의 투자확대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지금 경제난의 가장 큰 원인은 내수부진이다. 그 밑바닥에는 기업들의 투자위축이 자리하고 있다. 투자부진-고용사정 악화-소득 및 소비여력 감소-내수부진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악순환이 지속되면 성장은 둔화되거나 멈출 수밖에 없다. 당장도 문제지만 미래의 경제 측면에서도 투자위축은 정말 큰 일이다.
물론 투자를 해도 기술개발ㆍ자동화 등으로 인해 과거와 같은 고용개선 효과를 온전히 기대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그래도 기업의 투자확대가 일자리 창출의 가장 유효한 수단임은 틀림없다. 정부가 일자리 창출을 위해 수천억원의 예산을 쏟아넣는 등 안간힘을 다해도 별무효과라는 점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기업, 특히 대기업들은 돈이 넘쳐나는데도 투자를 꺼리고 있다. 경기전망이 불투명해 투자할 곳이 마땅치 않은 게 가장 큰 이유다. 그러면 여건이라도 좋아야 하는데 그것도 아니다. 수도권집중억제ㆍ출자총액제한 등 규제가 많으며 경영권 위협에 노출돼 있기까지 하다. 투자를 하고 싶어도 쉽게 엄두를 낼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모든 정책의 초점을 투자확대 유도에 맞춰야 한다. 사실 그 방법은 이미 나와 있다. 정부의 의지와 선택의 문제일 뿐이다. 경제주체들을 더 이상 지치게 만들면 안된다. 선수가 탈진하면 4전5기는커녕 그대로 주저앉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