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9월19일] <1194> 헨리 브로엄


과학자이며 대법관, 발명가ㆍ언론인ㆍ사회개혁 운동가…. 19세기를 풍미한 헨리 브로엄(Henry Brougham)의 면면이다. 문고판 서적 보급과 기술 대중화에서도 선구자다. 1778년 9월19일 에든버러에서 태어난 그는 자연과학과 수학ㆍ법률 등 공부했던 분야마다 두각을 나타냈다. 과학논문 ‘프리즘을 통한 빛과 색의 분석’으로 25세에 왕립학회 정회원으로 뽑힌 적도 있다. 사회생활의 첫 걸음은 ‘에든버러 리뷰’지 창간. 근대적인 정기간행물의 시초인 이 잡지의 창간 멤버로서 그는 과학과 정치ㆍ법률에서부터 식민지정책ㆍ시ㆍ소설ㆍ수학ㆍ미술, 심지어 외과수술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분야에서 필명을 날렸다. 자유주의 성향을 띠고 있는 휘그당에 영입돼 외무부를 거쳐 1810년 하원의원에 뽑힌 그는 개혁입법과 소송절자 간소화에 업적을 남겼다. 명연설로 유명했던 그는 6시간 동안 쉬지 않고 연설해 세계 최장연설 기록도 남겼다. 1820년에는 19세기판 ‘찰스와 다이애나의 이혼소송’이었던 캐롤라인 왕세자빈의 변호를 맡아 결혼을 파기하려던 국왕 조지 4세에게 패배를 안겼다. 영국 최초의 무종파 대학인 런던대학교와 양서의 저가 보급, 기술강습소 확산을 위한 ‘실용지식보급협회’ 설립도 그의 업적이다. 1830년 대법관에 올라 부패선거구를 일소하고 내각의 진퇴를 국왕이 아닌 선거가 결정하는 1832년의 1차 선거법 개정과 이듬해 노예폐지법도 주도했다. 1868년 90세로 칸에서 숨지기까지 평생을 개혁에 보낸 그의 이름은 고급형 승용차에 곧잘 붙는 ‘브로엄’에도 묻어 있다. 브로엄은 중세 유럽 귀족들이 타던 4륜 마차에서 연유된 것으로 잘못 알려져 있으나 런던의 좁은 길을 다닐 수 있도록 그가 발명한 ‘말 한 마리가 끄는 4륜 마차’가 원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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