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데스크 칼럼/9월 18일] 일그러진 40대의 초상화

"오랜만입니다. ○○○입니다." 한달 전쯤 오후 마감시간에 임박해 뜻밖의 전화를 받았다. 전 직장동료였던 A였다. 잠깐 볼 수 있느냐는 말에 기사마감이 급해 어렵겠다고 했더니 "사정이 있다"며 e메일을 하나 보내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꼭 봐달라고 신신당부했다. e메일의 내용은 이렇다. 환란후 실직·부도·이혼 내몰려 '저는 지난 1999년 2월 전 직장을 떠나 증권사로 옮겼습니다. 2001년 강남의 한 증권사 지점에서 제법 크게 잘나가며 주식영업을 하던 중 9ㆍ11테러를 만나 수십억원의 손님들 계좌가 큰 손실을 봤습니다. 이후 거래하던 손님들에게 개인적으로 이리저리 보상을 해주면서 참으로 힘든 거액의 경제적 짐을 떠안았습니다. 몇 년간 그 짐에서 벗어나려 무수히 발버둥쳤지만 나날이 힘들어지는 집안살림으로 아내와의 반목과 불화는 깊어만 갔습니다. 결국 2005년 초 신도시의 한 지점을 끝으로 증권사에서 나오게 됐습니다. 하지만 재취업은 어렵기만 했습니다. 그리고 경제사정은 갈수록 악화돼 끝내 그 해 8월 말 아내와 이혼하게 됐습니다 이혼할 당시 분당에서 보증금 1,000만원에 월세를 살고 있었고 밀린 월세를 다 제하고 나니 200만원이 남아 갈 곳 없어 아들과 함께 처가로 들어가는 아내에게 건네주고 저 또한 아무것도 가진 게 없고 갈 데가 없어 고시원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해 겨울 몇 년간 그렇게 힘들게 버텨왔지만 끝내 신용불량자까지 됐습니다. 신불자까지 되고 나니 이젠 과거의 경력과 학력을 살려 취업할 수가 없게 돼 그 이후로 지금까지 대리운전, 식당 잡일, 막노동, 보습학원 선생, 과외 선생, 새벽 신문배달 등 10여 가지의 일을 하며 지내왔습니다. 아들이 올해 고등학교 2학년입니다. 아내가 이혼 전 갈비뼈 5개를 잘라내는 큰 수술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지난해 가을부터 몸이 다시 악화돼 아들을 제가 고시원에 데려와 같이 지내고 있습니다.' 그는 '이제는 길거리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는 것조차 두렵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도움을 요청했다. 친구 B는 국내에서 좋은 대학과 대학원을 나왔다. 미국에 유학갔었으나 부모님이 갑자기 아프면서 학업을 포기하고 귀국했다. 그리고 몇 년간 직장생활을 했다. 하지만 유학에 대한 미련이 남아 뒤늦게 다시 미국 괜찮은 대학의 박사학위 과정에 진학, 비교적 짧은 시간에 우수한 논문으로 학위를 취득했다. 하지만 그가 귀국해 맞닥뜨린 한국 사회는 이미 변해 있었다. 미국 박사학위 소지자도 넘쳐나는데다 적지 않은 그의 나이가 문제가 됐다. 여러 연구소나 기업의 문을 두드렸지만 '나이 많은 신참 박사를 부담스러워 하는 분위기' 때문에 끝내 취업하지 못했다. 그는 요즈음 연락이 안 된다. 전화를 걸어오지 않을 뿐 아니라 전화를 해도 받지 않는다. 친구 C는 몇 년 전부터 감정평가사 준비를 한다. 40대 중반에 시험준비를 시작해 2년째 도전 중이다. 그 역시 괜찮은 대학과 대학원을 나왔다. 그리고 '잘 나가던 증권맨'이었다. '잠수탄' 친구들지금행적은 그러나 IMF 외환위기 과정에서 그가 다니던 증권사가 없어지면서 졸지에 실업자가 됐다. 이후 재취업이 안 됐다. '망한 증권사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번번히 그의 앞길을 막았다. 이후 전업 주식투자자로 나서기도 했지만 별로 재미를 보지 못하고 이제는 노후를 생각해 장기적으로 할 수 있는 분야라며 감정평가사에 도전하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10여년 간 역동적인 한국 사회의 변화상 가운데 하나는 '40대, 중산층의 몰락'이다. 같은 대학, 같은 학과를 나와 똑같이 사회에 진출했어도 20여년이 지난 지금 연락이 안 되는 친구들이 상당수다. 실직해서, 사업이 부도나서, 재취업이 안돼서, 신용불량자로 전락해서 이들은 시쳇말로 '잠수를 탄다.' 아직 금융위기가 진행 중이라는 이 가을, 증시는 폭발적으로 상승하고 있고 경기회복의 목소리는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연락이 안 되는 우리 친구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지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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