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 현대그룹에 대한 적대적 인수합병(M&A) 논란의 당사자인 현대중공업그룹이 공식적인 입장 표명에 나섰다. 지난달 27일 골라LNG 계열사로부터 현대상선의 지분 26.68%를 매입한 것은 ‘단순 투자 목적’이라고 공시를 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 공시로 논란이 잠재워질 것인가. 안타깝게도 그럴 가능성은 낮다.
잠시 시계를 거꾸로 돌려보자. 시점은 2004년 10월18일. 당시에도 조선업체가 해운업체의 백기사로 나서며 논란을 일으키는 전례가 있었다. 대우조선해양이 골라LNG 등과의 경영권 분쟁에 휘말린 대한해운의 요청을 받아들여 시간외거래로 이 회사의 자사주 7.55%를 사들인 것이다. 그러나 대우조선해양은 곧이어 다른 마음을 품고 있음을 드러낸다. 추가 공시를 통해 ‘경영참가 목적’이 있음을 밝힌 것. 백기사가 흑기사로 돌변하는 순간이었다.
다시 현재로 돌아와보자. 지난달 27일 당시 현대중공업그룹 측은 “현대그룹이 해외자본들로부터의 경영권 위협에 노출돼 백기사로 나섰다”고 밝혔다. 그러나 최근 이와 같은 입장은 살짝 비틀리고 있다. “현대중공업과 현대삼호중공업이 현대상선 지분 매입에 나선 것은 주주이익 극대화를 위함”이라고 뉘앙스에 변화를 주기 시작한 것이다. 백기사 명분은 이제 뒷전이다.
현대중공업그룹은 여전히 현대그룹 경영권에 간섭할 뜻이 없다는 단서를 달고 있지만 과거 대한해운 사례처럼 백기사의 변심을 겪어본 시장관계자들은 그 진정성에 의문을 던진다.
만약 백기사가 변심을 드러낸다면 시장의 판단은 어떻게 될까. 일각에서는 약육강식의 냉혹한 경제원리 속에서 취약한 지배구조를 가진 기업을 월등한 자금력을 가진 기업이 인수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사안의 본질을 모르는 책상물림의 ‘공자왈’이다. 현대그룹 경영권 갈등의 본질은 ‘주주이익 극대화’라는 충실한 시장논리가 아니라 현대가의 재산다툼이다. 기업들이 정상적인 경영활동에 쏟아야 할 귀중한 재원과 시간을 오너 일가의 집안싸움에 허비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중공업그룹이나 현대그룹도 글로벌경쟁에서 살아남자면 가야 할 길이 멀다. 대주주의 감정싸움에 발목이 잡혀 스스로 생존의 기회를 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민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