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리빙 앤 조이] 美術, 시대의 상처와 아픔을 논하다

박은선作-제 녹용을 받아주세요 (Please take my antler), 2005 oil on resin, sculpey ,fur 21×21×27cm

김재홍作거인의 잠-길Ⅲ (김재홍은 일제 때 징병에 끌려갔다 10년 만에 국군의 신분으로 귀향한 장인의 삶을, 그의 몸에 투영시켜 화폭에 담았다. 김재홍은 "장인의 몸을 가로 지르는 선은 국토를 분할하고 있는 휴전선" 이라고 말했다.) 333x162㎝, 유화, 2004

구본주作-눈칫밥 30년 (구조조정과 정리해고라는 총알이 머리위로 날아다니는 난리통에 늙은 월급쟁이는 납작 엎드렸던 맨홀을 들고 '지금 나가 고개를 들고 나가도 좋을지'를 탐색한다.)700x700x200㎝브론즈, 1999

구본주作-아빠의 청춘 700x500x1870㎝, 나무, 2000 ('아빠의 청춘' 도 가장이면서도 집 안에서는 마누라에게 "돈 벌어오라" 고 구박 받고, 밖에서는 잘릴까봐 눈치를 보는 힘 빠진 아버지의 모습이다. 구본주의 미망인 전미영씨는 "나이는 들어 언제 잘릴지 모르는데다, 어디다 내세울 것이라고는 없지만 참았다 쏟아져 나오는 오줌 줄기를 보며 '그래도 내 오줌발 만큼은 죽지 않았다' 고 자위하는 슬픈 아빠의 모습을 표현한 것" 이라고 말했다.)

박은선作-충성, 21×21×27㎝, oil on resin, 2005 (박은선은 "충성 같은 작품을 하면서 음식을 그리는 것 보다 실제 음식 처럼 만드는 것이 의사전달에 용이할것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 "조소를 따로 배운 적은 없지만 한 개도 빠짐없이 직접 내 손으로 만들었다" 고 말했다.)

송영규作 '고백록'- 그의 작품 '고백록' 을 보면 그림안에 묘사된 인물들은 손을 잡고 있지만 땅에 발을 딛지 못하고 허공에 떠 있다. 이는 사람들이 관계 맺고 있고, 서로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그 관계가 온전치 못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310x180㎝아크릴

황순일作 '낯선 어둠 속으로' 194x130㎝, 2003- 황순일은 일자리를 잃고 방황하던 어느날 터진 봉투 밖으로 삐져 나온 쓰레기 더미를 보았다. 황순일은 "거기에는 용도폐기된 퇴물들이 널부러져 있었고, 일자리를 잃은 나의 모습도 투영돼 있었다" 고 말했다.

[리빙 앤 조이] 美術, 시대의 상처와 아픔을 논하다 우현석 기자 hnskwoo@sed.co.kr 박은선作- 제 녹용을 받아주세요 (Please take my antler), 2005 oil on resin, sculpey ,fur 21×21×27cm 김재홍作 거인의 잠-길Ⅲ (김재홍은 일제 때 징병에 끌려갔다 10년 만에 국군의 신분으로 귀향한 장인의 삶을, 그의 몸에 투영시켜 화폭에 담았다. 김재홍은 "장인의 몸을 가로 지르는 선은 국토를 분할하고 있는 휴전선" 이라고 말했다.) 333x162㎝, 유화, 2004 구본주作-눈칫밥 30년 (구조조정과 정리해고라는 총알이 머리위로 날아다니는 난리통에 늙은 월급쟁이는 납작 엎드렸던 맨홀을 들고 '지금 나가 고개를 들고 나가도 좋을지'를 탐색한다.)700x700x200㎝브론즈, 1999 구본주作- 아빠의 청춘 700x500x1870㎝, 나무, 2000 ('아빠의 청춘' 도 가장이면서도 집 안에서는 마누라에게 "돈 벌어오라" 고 구박 받고, 밖에서는 잘릴까봐 눈치를 보는 힘 빠진 아버지의 모습이다. 구본주의 미망인 전미영씨는 "나이는 들어 언제 잘릴지 모르는데다, 어디다 내세울 것이라고는 없지만 참았다 쏟아져 나오는 오줌 줄기를 보며 '그래도 내 오줌발 만큼은 죽지 않았다' 고 자위하는 슬픈 아빠의 모습을 표현한 것" 이라고 말했다.) 박은선作- 충성, 21×21×27㎝, oil on resin, 2005 (박은선은 "충성 같은 작품을 하면서 음식을 그리는 것 보다 실제 음식 처럼 만드는 것이 의사전달에 용이할것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 "조소를 따로 배운 적은 없지만 한 개도 빠짐없이 직접 내 손으로 만들었다" 고 말했다.) 송영규作 '고백록'- 그의 작품 '고백록' 을 보면 그림안에 묘사된 인물들은 손을 잡고 있지만 땅에 발을 딛지 못하고 허공에 떠 있다. 이는 사람들이 관계 맺고 있고, 서로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그 관계가 온전치 못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310x180㎝아크릴 황순일作 '낯선 어둠 속으로' 194x130㎝, 2003- 황순일은 일자리를 잃고 방황하던 어느날 터진 봉투 밖으로 삐져 나온 쓰레기 더미를 보았다. 황순일은 "거기에는 용도폐기된 퇴물들이 널부러져 있었고, 일자리를 잃은 나의 모습도 투영돼 있었다" 고 말했다. 관련기사 • 미술이 그린 상처 • 그림 읽고 취재하기 • 여름 흥행전쟁 엑스맨vs슈퍼맨 • '건축도자' 건축의 변방에서 중심으로 이동 • 물벼락 맞고, 삼바춤 추고, 장미향 만끽 “우리 오빠는 특전사령부 소속의 직업 군인이다. 가난한 집안의 아들인 오빠는 동생인 나를 미술대학에 진학시키기 위해 부사관으로 입대했다. 오빠는 그 적은 월급으로 내 등록금을 댔다. 동생을 위해 군인이 된 오빠는 진급을 위해 이라크 파병에 자원했다. 오빠의 애인도 특전사 중사인데 그 언니도 이라크에 파병됐다. 이라크에서는 미군이 탱크의 포탄으로 열화우라늄탄을 사용해, 여기에 노출되면 암에 걸리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나는 왜 우리 오빠가 남의 나라 전쟁에 휘말려 전장으로 가야 했는지 알 수 없다. 그런 일련의 사태가 정당한 지도 이해되지 않는다. 오빠는 우리(국가)의 의지와 상관 없이 이라크에 갔고, 힘 없는 나는 이 같은 현실을 막을 수 없었다. 오빠의 고생 덕에 공부를 한 나는 오빠에게 그 흔한 보신탕 한 그릇 대접할 수 없었던 적이 있었다. 그 때 나는 오빠가 건강하기를 바라면서 ‘충성’이란 작품을 만들었다. 뚝배기 안에 들어 앉은 개는 나 자신의 자화상인 동시에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오빠의 모습이다” 작가 박은선은 ‘충성’이라는 소조 작품이 품고 있는 상처와 아픔을 이렇게 설명했다. ‘얼큰한 탕국 안에서 경례를 붙이고 있는 개의 모습이 군인 같다’고 추측했던 기자의 머릿 속에서는 로또의 숫자를 세개 맞췄을 때 처럼 흥분과 아쉬움이 교차했다. 진지한 미술의 발칙한 화법은 흥분이었고, 그림을 해석하는 상상력의 빈곤은 아쉬움이었다. 글은 시각적 기호를 통해 인간 상호간의 의사소통을 하기 위한 관습적·규약적 체계를 말한다. 인간의 1차적인 의사소통 방식을 언어라고 하면 문자는 2차적인 의사소통 방식인 셈이다. 그래서 기자를 포함해 글 쓰는 일을 업으로 삼는 이들은 자신이 쓰는 기사의 의미 전달이 정확한 지에 대해 가슴 졸인다. 해석이 자유로울 수 있는 미술 작품을 볼 때 마다 기자는 ‘사람들은 미술가가 의도한 회화나, 조형의 의미를 과연 몇 %나 이해 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에 탐닉하고 싶었다. 화가의 생각과 그의 작품을 보는 관람객의 괴리에 다리를 놓는 것은 어느 누구의 책무도 아니지만, 아울러 그 작업은 금단의 영역에 있는 것도 아닐 터이다. 더불어 기자는 아름다움 뿐 만 아니라 시대의 상처와 아픔에 대해서 소리치고 있는 미술에도 눈길을 돌리고 싶었다. 그런 작품들은 자신의 속내를 관람객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풍부한 상상력이나, 전문가적 지식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도 세상을 살아가면서 느끼는 평균적인 고단함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누구든 이 같은 일련 작업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시대의 상처와 아픔’을 외치는 미술의 소리를 듣기 위해 문외한 혼자 떠난 배낭여행이다. "얌전히 벽에 걸린 그림은 싫다" 일제 때 징병됐다 10년만에 귀향$ 장인의 육신에 현대史 질곡 표현 몸에 국토 가른 휴전선 그려 서양화가 김재홍(48)은 친아버지나 다름 없는 장인의 몸에 우리 역사의 질곡을 투영시킨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의 장인은 일제때 징병 나갔다가 하바로프스크에서 소련군의 포로가 됐다. 장인은 포로수용소에서 4년간 벌목 노역에 투입됐다. 그는 해방 후 풀려나서 신의주에서 친척이 운영하는 한의원에서 일을 하던 중 한국전쟁이 터져 한 동안 숨어 지냈다. 그러나 그는 연합군의 북진(北進)때 젊은 남자라는 이유로 미군병사에게 잡혀 미군의 포로가 됐다. 반공포로 석방 때 포로수용소를 탈출한 그는 국군에 자원 입대했다. 그는 얼마 후 첫 휴가를 받았다. 일본군으로 징병 당해 집을 떠난지 10년 만이었다. 집을 찾은 바로 그 날, 대문에는 상중(喪中)이라는 등이 걸려 있었다. 그가 집에 도착하기 몇 시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었다. 김재홍은 "그분의 생이야 말로 그대 한국사를 축약해 보여주는 텍스트라고 생각했다"며"그때 마침 인체와 자연의 이중구조를 표현하는 작업을 하던 중이어서 장인어른의 몸을 이용해보자는 생각이 떠올랐다"고 말했다. 가로 4㎙가 넘는 그의 대작 '장막'에 묘사된 상반신은 그의 장인을 모델 삼아 그린 것이다. 그는 99년 이전까지 세상에서 회자되는 이야기나 문제들을 그림으로 묘사하는 것에 관심이 있었다. 그러다가 99년부터 동강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자연이 죽으면 인간도 죽는다. 자연과 인간은 하나다'라는 생각으로 동강을 그렸다. 자연을 그리던 이 시절 그의 그림은 따뜻했다. 하지만 얼마 후 장인의 몸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그의 그림은 다시 '시대의 상처와 아픔'으로 회귀했다. 김재홍은 "내 그림 '장막'에서 장인의 몸을 분할하는 선은 다름 아닌 국토를 가로지르고 있는 휴전선"이라며"휴전선을 통해 그분의 개인적 질곡이 바로 우리 역사라는 것을 표현한 것"이라고 말했다. 기자는 이 대목에서 이런 유형의 작품이 대중들에게 얼마나 인기를 얻는지 궁금해졌다. 김씨는 "잘 팔리는 예쁜 그림 대신 무거운 주제의 그림을 그리는 이유가 뭐냐"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 그는 "내가 좋아서 하는 것 일뿐"이라며"내가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리는 것은 화가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 발 더 나아가 "사람들은 IMF때 힘들었다고 하지만 나는 IMF가 왔는지 지나갔는지도 몰랐다"며 "화가는 언제가 춥고 배고픈 사람들"이라고 되뇌었다. 잘릴까봐 눈치보는 샐러리맨 조각가 구본주는 한 때 조각의 재료인 금속과 돌의 질감에 대한 이해가 가장 깊은 미술가로 손 꼽혔다. 그가 '한 때 그랬던' 것은 지금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탁월한 재능 때문인지 그의 작품은 구구한 설명이 필요 없어 보인다. 작품에 눈길이 멎는 순간, 제목으로 시선을 옮기는 순간, '아하'하는 감탄사가 입안에 맴돌고, 이어 코끝 찡해지는 감동이 전해 온다. 그의 작품 '눈칫밥 30년'을 보자. 대머리 벗겨진 늙은 월급쟁이의 두부(頭部). 치켜 뜬 눈은 자신의 머리 위에서 돌아가는 상황을 염탐하려는 듯 불안하고도, 소심해 보인다. 이 작품은 구본주가 99년에 완성해 두 번째 개인전에 전시했던 것이다. 그는 이 작품에서 IMF때 살아 남으려고 땅속 밑에 납작 업드려 있다가 맨홀 뚜겅을 열고 총알이 빗발치는 밖으로 나가도 될지를 염탐하는 힘없는 가장의 모습을 형상화 했다. 구본주의 미망인 전미영씨는 "이 작품은 '정리해고 때 잘리지 않을까?' '어느쪽으로 줄을 서야 살아남을까?'등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 샐러리맨의 모습"이라고 설명했다. '아빠의 청춘' 역시 가장이면서도 집 안에서는 마누라에게 "돈 벌어오라"고 구박 받고, 밖에서는 잘릴까봐 눈치를 보는 힘 빠진 아버지의 모습이다. 스트레스를 해소할 데라고는 술밖에 없는 늙은 아버지가 거나하게 취해 집에 들어가는 길에 전봇대에다 참고 있던 오줌 한 줄기를 시원하게 갈기는 모습이다. 상처와 고뇌 작품에 투영 구본주作 '아빠의 청춘'- 변하는 세상 따라가기 힘든 늙고 힘빠진 家長의 모습 박은선作- '충성' - 여동생 대학에 보내려고 특전사 자원한 오빠를 위한 獻辭 전씨는 "나이는 들어 언제 잘릴지 모르는데다, 어디다 내세울 것이라고는 없지만 참았다 쏟아져 나오는 오줌 줄기를 보며 '그래도 내 오줌발 만큼은 죽지 않았다'고 자위하는 슬픈 아빠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고 말했다. 전씨는 구본주의 작품에 대해 "그의 작품에는 무섭게 변화하는 사회에 적응하려고 발버둥 치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깔려 있다"며"나무든, 쇠든 재료를 막론하고, 그 안에 사랑을 담아냈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미술사적으로 평가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처럼 구본주는 생전에 무기력해 보이는 소시민의 모습을 비틀어서 표현하기를 즐겼다. 그의 작품은 우습지만 웃어 넘겨버릴 수 만은 없는 희화화(戱畵化)의 연속이었다. 구본주의 꿈은 그런 평범한 사람들을 영웅화 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2003년 10월 광주시립미술관에서 '별이 돼다'라는 전시를 기획했다. 작은 샐러리맨의 조각 1,000개를 만들어 천정에 걸어 놓는 컨셉이었다. 세상의 가장들이 아침에 출근했다가 밤에 들어와서 에너지를 충전시키고 나가는 모습을 형상화 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전시를 얼마 앞둔 9월29일 귀가 도중 교통사고로 운명을 달리했다. 너무 사랑한 나머지 하늘의 별로 만들고 싶던 소시민들 보다 그가 먼저 별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때까지 그가 만든 소시민의 조형은 겨우 두 개. 그의 사망 소식을 접한 후배들은 나머지 998개의 가장과 소시민을 만들어 천정에 걸었다. 전시는 예정대로 진행됐고 또 막을 내렸다. 사글세 20만원 VS 용돈 30만원 신예 작가 박은선은 가난하게 자랐다. 그녀의 집은 당시만 해도 달동네에 머물던 상월곡동 사글셋방이었다. 하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그녀에게 그림과 경제력은 별개의 문제였다. 그래서 그녀는 96년 유명한 예술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그런데 그녀가 진학한 예고에는 대통령 딸도 있고, 재벌 딸도 있었다. 학교는 쌀집과 푸줏간집 아이들이면 '있는 집 자식'으로 분류되던 그녀의 동네와는 차원이 다른 세상이었다. 박은선은 "우리 가족은 한 달에 20만원 짜리 사글셋방에 살았다. 그런데 친구들은 고등학생임에도 불구하고 한달 용돈을 30만원이나 받았다. 친구들은 과외를 했고, 집에 식모와 운전기사가 있었다. 우리 할머니는 식모살이를 했지만 나는 고등학교때 식모를 둔 집의 아이들을 학교에서 처음 보았다"고 말했다. 감수성이 예민하던 사춘기에 그녀의 눈에 비친은 세상은 온전치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전공이 미술임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레 사회 구조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그 같은 정서는 그녀의 작품에 고스란히 투영된다. 박은선은 "고등학교를 빚으로 다닌 나는 그래서 공부도 열심히 하고, 그림도 열심히 그렸다"며"그런 성장 환경 때문에 나는 체질적으로 가벼운게 싫고 무거운 주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때문에 그의 작품 '충성'이 재기발랄하면서도 통렬한 풍자와 절절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재미있는 것은 그녀의 전공이 조소가 아닌 회화였다는 사실이다. 박은선은 "충성 같은 작품을 하면서 음식을 그리는 것 보다 실제 음식 처럼 만드는 것이 의사전달에 용이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며"조소를 따로 배운 적은 없지만 한 개도 빠짐없이 직접 내 손으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팔리지 않아도 내가 좋아 그린다" 송영규作 '고백록'- 나를 확인하는 중요한 방법? "내게 상처입히는 他人이더라" ▶황순일作 '낯선 어둠 속으로' 해고된 날 눈에 띈 쓰레기 그위에 포개진 나를 그렸다 "주체적 죽음까지 묘사하고 싶어" 작가 황순일(36)은 썩어가는 고기와 동물의 뼈를 그린다. 그가 처음부터 부패해 가는 고기를 그렸던 것은 아니다. 이 같은 시도가 시작된 것은 2002년초 였다. 당시 그는 미술학원 강사로 밥벌이를 하고 있었는데, 학원이 합병을 하면서 일자리를 잃었다. 그는 "내 딴에는 식구 이상으로 열심히 했는데 잘린 게 몹시 서운했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일자리를 잃고 방황하던 어느 날 귀가하던 그의 눈에 터진 쓰레기 봉투가 눈에 띄었다. 황순일은 "거기에는 용도 폐기된 퇴물들이 널부러져 있었고, 일자리를 잃은 나의 모습도 투영돼 있었다"며 "그날 바로 작업실로 돌아와 쓰레기, 신문뭉치 등 용도 폐기된 물건들을 어두운 배경 위에 그리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후 그는 "헌신짝 버리듯 한다"는 말이 떠올라 낡은 구두도 그렸고, 독산동 도살장을 찾아가 소의 두개골을 구해서 그걸 그리기도 했다. 하지만 검은 배경에 무채색의 뼈를 그리니까 재미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붉은 핏빛의 고기를 그렸고, 최근에는 껍데기가 벌어진 꽃게, 해산물, 과일 등 파괴되고 으깨진 것을 그리고 있다. 그는 "으깨어진 해산물과 과일은 종속되고 억압된 주체의 죽음을 이야기 하는 것"이라며 "배경에 보이는 스피커는 기계적 사운드로 상황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라고 그림의 의미를 설명했다. 황순일은 "그런 대상들이 썩어가고 스러져가는 것은 현대인의 사멸을 의미하는 것"이라며 "나는 육체적인 죽음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주체적인 죽음까지 묘사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관람객들이 당신 그림 속의 고깃 덩어리들이 썩어가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관람객들은 보통 '생생하다' '잘 그렸다'고만 생각한다"며 "그들이 그림 속의 고기가 부패되는 과정이라고 느끼는지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해석의 여지는 관람객들에게 열려 있는 것"이라며 "내가 추구하고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이 100%전달 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작품의 판매에는 관심이 없다'는 그는 "나는 미술의 사회적 기능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한다"며 "벽에 걸어두고 싶은 그림을 그리기 보다는 스스로를 돌아보고 생각할 수 있는 작업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또 사진 처럼 정밀한 묘사에 대해 "나는 서술적이고 서사적인 작업을 하고 싶은데 추상화로는 그 이야기를 하기 어려워, 구상을 통해 나의 생각을 이야기 하는 것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온전하지 못한 사람들의 관계 반면 오는 7월 4일까지 문화일보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는 서양화가 송영규는 이들과는 달리 사적인 인관관계에서 발생하는 상처를 묘사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그는 사람들이 관계를 맺고, 서로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그 관계가 온전치 못하다는데 주목하고 있다. 그의 작품 '고백록'을 보면 그림안에 묘사된 인물들은 손을 잡고 있지만 땅에 발을 딛지 못하고 허공에 떠 있다. 이는 사람들이 관계 맺고 있고, 서로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그 관계가 온전치 못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는 "나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방법중 하나가 나에게 상처를 입히는 타인이라고 생각한다"며 "두번째 개인전 '블라인드 핸드'역시 관계를 이루는 통로 중에 가장 전위에 있는 매개체가 사람의 손이라고 생각했고, 손을 통해 믿음을 원하지만 확신을 얻지 못하는 상태를 은유했다"고 말했다. 세번째인 이번 전시는 '타인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통해 내 존재를 확인하는 작업이다. '세상에 아무도 없고 나 혼자만 있으면 내가 나라는 것을 알 수 있을까'하는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송영규는 "타인이라는 존재가 없고 세상에 나 혼자만 고립돼있는 상황을 가정해서 작업을 했다"며 "내 작품 활동의 흐름은 상처에서 시작해서 '내가 나'라는 것을 알게 되는 일련의 과정"이라고 말했다. 입력시간 : 2006/06/28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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